1. 들어가며
대천읍내에서 웅천으로 가는 구길로 접어들어 성주로 빠지는 분기점 전, 그 우측으로 나지막한 동산이 위치 하는데, 그곳에 보령 현충탑이 세워져 있다.
요즘 한참동안 이지역에 고층 아파트가 건립 중이어서 현충탑이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하여 다녀왔다.
아파트 단지는 골조 공사를 마치고 한창 마감공사가 진행되고 있기에, 예전의 현충탑 스카이 라인이 왜소화 되어 막혀있어 답답함을 주지만 서쪽으로 아직 개발이 되지 않아 그래도 좀 다행스럽다. 하지만 언젠가는 도심화 되어 결국 아파트 단지내의 소공원 처럼 변하게 될 것이라는 예상을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군사독재 정부가 들어선 후에 남북은 이념적 대립을 극대화 하였다.
그 중에 하나가 충(忠)과 효(孝)를 결합한 '충효사상'을 국민들에게 의식시키는 것으로 권력을 유지시키는 한 방편으로 삼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국가와 민족 앞에서는 개인의 목숨까지도 바쳐야 하는 것이 당연시 하는 시기였다.
그렇기에 지역마다 전쟁 중 사망한 전몰자를 위하여 충혼탑을 세워 국민들의 교육을 강화하는 장으로 만들었다. 유신정권이 물러난 후에도 그 이념은 지속되고 있지만, 그 당시처럼 엄숙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봉황산에 있던 충혼각을 한적하고 조용하며 넓게 조망할 수 있는 궁촌동으로 옮겨온 지도 15년에 가까워진다.
하지만 궁촌동에도 도시화 바람을 비껴갈 수는 없는 실정이고 현충탑을 옮길 수 있는 형편도 못된다. 이제는 현충탑도 도심속의 소공원으로, 소시민들의 휴식터로 자리매김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본다. 충효에 대한 의식화를 강조하는 것보다 자연히 시민들 가까이에서 호국영령들이 함께 숨쉬는 공간으로써의 역활이 중요하다고 본다.
충성이니 효행이니도 중요하지만, 강요에서 나오는 심성이 아니기에 '교육의 장' 보다는 '시민들의 공간'으로 더불어 나가야 하는 것이 보령 현충탑의 역활인 것으로 보인다.
2. 보령 현충탑
@ 위치 ; 보령시 궁촌동 79-1
* 현충탑 건립 취지문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고귀한 삶을 희생하신 호국영령의 얼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 유족들의 협의에 의해 위패를 제작하고, 봉황산 중턱에 충혼각을 건립하여 충혼 954위를 모셔오던 중 충혼각이 협소하고 노후 되어 위패 안치가 곤란할 뿐 아니라,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 장소이기에 호국영령을 모시는 곳으로 적절치 못한 점과 참배객 이용이 불편하다는 여론에 따라 이전을 검토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2004년 8월 보훈 단체장 간담회를 통해 충혼각을 이전하기로 결정하여, 2005년 4월 충혼각 이전 계획에 따라 이전 건립 장소로 2006년 5월 접근성과 주변여건 등이 좋은 이곳 궁촌동 79-1번지 일원이 확정 되었다.
현충탑 건립사업은 2007년 7월 9일 착공하여 2008년 6월 6일 준공 되었으며, 전물 호국 영령들의 넋을 기리고 유족들의 긍지와 자긍심을 고양시킴은 물론 충렬의 의지를 드높이고, 나라사랑 산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건립하였다.
또한 당초 대천동 충혼각에 모셨던 호국영령 위패 954위는 2008년 8월 21일 성주면 개화리 모란공원 충혼각으로 이전하여 모시고 있다. 2008. 6. 5. (현장 안내판 발췌)
@ 현충탑 입구 안내문 (박정희가 쓴 충혼각이란 현액이 걸려있다.)
@ 충혼의 얼이 하늘에 닿을 듯 형상화한 탑비.
@ 탑비 중앙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을 형상화 하였다.
@ 제단에서 바라본 불꽃 상징 조각품
@ 제단 앞에 서각된 혼령의 명단
@ 현충탑을 둘러싼 전몰자를 형상화한 벽체와 조각상
@ 2008년 충혼각을 이전하면서 건립 취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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