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신라의 석탑이 화려함과 웅장함의 극치를 보여준다면, 백제의 석탑은 단아하면서 우아함을 보여준다.
성주사지 금당지 후편에 위치한 3기의 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석탑이면서도 백제탑의 형식을 배제하지 않은 지역적 특성을 가졌다고 볼 수 있겠다. 신라시대 보편적인 가람 형식을 벗어나 금당 후편에 3기의 석탑을 다시 세운 것은 극히 파격적인 행위라 볼 수 있다. 왜 그들은 보편성을 배제하고 독특한 구도로 이 탑들을 세웠을까?
성주사지 천년 역사관의 자료에 의하면 중건기 성주사에서 「 창건기 성주사는 13세기 중엽 화재로 인하여 절 내부의 상당수 건물이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소실된 성주사는 '대덕5년(1301)'이 새겨진 청동 광명대나 청자 편 등의 유물을 통해 13세기 후반 경에 다시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중건된 성주사는 절 중심부에 삼천불전 등의 대형 건물이 새롭게 들어서고, 사역을 감싸는 회랑이 담장으로 변경되며, 외부에 있던 3층 석탑 3기를 금당과 강당 사이에 나란히 배치하여 독특한 가람 형태를 갖추었다.」라고 사적기를 인용하여 기록해 놓았다.
이것으로 볼 때, 3기의 석탑은 고려시대 주변에 산재하였던 폐사한 절들에서 옮겨와 성주사 경내로 옮긴 것이라 보는데, 정광, 가섭, 약사여래의 사리탑으로 밝히고 있다. 한 학자에 의하면 이 탑들은 서산매애삼존불과 같이 제화갈라 보살 - 석가불 - 미륵보살의 구도로, 과거 - 현재 - 미래를 책임지는 부처님을 형상화 한 것으로, 3(三)이란 숫자가 그 시대에도 큰 의미를 가졌다고 보았다.
대체적으로 3기의 탑 모두 상륜부는 없어진 상태이고, 2중 기단(二重基壇) 위에 만들어진 3층 석탑으로 화강암 또는 반려암으로 조성 되었으며, 몸돌에는 기둥을 나타내는 조각을 하였고, 1층부 전면에는 사리를 넣을 수 있는 문들이 조각되어 있는데 그 모양은 모두 다르다. 자물쇠와 문고리를 양각한 동, 서탑과 오돌도톨하게 광정을 박아 대문에 자물쇠를 단 중앙탑의 조각이 차이가 난다. 탑의 지붕돌에는 작은 구멍들이 나 있는데, 팔관회 등 불교 주요 행사시에 장식품을 꽂아 화려하게 치장하던 장치란다. 보령사지 동 삼층 석탑이 일제 강점기 시대에 문화재 지정을 두고 실수로 누락하게 된 것을 100년 가까히 만에 보물로 지정 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중앙탑은 다른 탑들과 비교해 화려함과 경쾌함을 지나고 있는데 가장 많은 파손을 당하였고, 서쪽탑은 1971년 해체,수리 당시에 몸돌에서 네모난 사리공을 발견하였는데 그 안에 향나무 썩은 가루와 먼지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다른 두 탑에 비해 너비가 넓고 장중한 느낌이 드는 탑으로 기단이나 지붕돌의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본다.
동쪽 탑은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균형잡힌 비례와 체감, 우수한 조형미를 갖추고 있다.
성주사지에 있는 이 세 탑은 백제 장인의 솜씨를 이어받은 통일신라 후기의 석조물로 성주사지만의 독특한 구조의 유물이라 할 수 있겠다.
2. 보령 성주사지 삼층 석탑
@ 위치 ;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 (성주사지 내)
1) 보령 성주사지 서 삼층 석탑
@ 지정 ; 보물 제 47호
성주사지 금당지 뒤 3기의 석탑 중 서쪽에 있는 탑이다. 2중 기단(二重基壇) 위에 만들어진 3층 석탑으로 면석(面石)과 탑신석(塔身石)에는 우주(隅柱; 건물 모퉁이에 세운 기둥)와 탱주(撐柱; 쓰러지지 않도록 받치는 기둥)가, 지붕돌에는 4단의 층급 받침이 새겨져 있는 등, 통일신라 말기(9c)의 전형적인 3층 석탑 양식을 띠고 있다. 화강암으로 되었으며, 높이는 443cm이다.
이 탑의 지붕돌에는 작은 구멍이 있는데, 이는 불교 행사 때 금동판이나 기타 장식품 등을 매달아 탑의 화려한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현재 상륜부는 없어졌다. 이 탑은 승탑(부도)으로 추정 되었으나 성주사 사적기에 적힌 바에 따르면 정광, 가섭, 약사여래사리탑 중의 하나이며, 발굴 조사 결과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으로 밝혀졌다.
2) 보령 성주사지 중앙 삼층 석탑
@ 지정 ;보물 제 20호
성주사지 금당지 뒤 3기의 석탑 중 가운데에 있는 탑이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강력한 국가를 상징하려고 초기에는 튼튼하고 높은 2중 기단(二重基壇)을 가진 거대한 3층 석탑을 만들었는데, 통일신라 말기에 이르러서는 3층 석탑의 규모가 작아진다. 이 석탑은 규모만 축소되었을 뿐 형식은 2중 기단위에 3층 석탑을 세우는 통일신라 말기의 석탑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재료는 반려암이며, 높이가 410cm이고, 상륜부가 없어졌다.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으며, 날카로운 윤곽의 지붕돌이 특징이다. 이 탑은 승탑(부도)으로 추정 되었으나 성주사 사적기에 적힌 바에 의하면 정광, 가섭, 약사여래사리탑 중의 하나이며, 발굴 조사 결과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으로 밝혀졌다.
3) 보령 성주사지 동 삼층 석탑
@ 지정 ; 보물 제 2021호
보령 성주사지 동 삼층 석탑은 금당(절의 본당, 본존상을 모신 법당)터 뒤에 있는 3개의 석탑 중 동쪽에 있는 탑이다. 이 탑은 승탑으로 추정되었으나 성주사 사적기에 적힌 바에 따라 정광, 가섭, 약사여래사리탑 중의 하나로 추정된다. 석탑은 중앙 삼층 석탑을 중심으로 얀 옆에 동 삼층 석탑과 서 삼층 석탑이 나란히 서 있다. 국내에는 이와 같은 가람의 배치는 이례적인 것인데 발굴 조사 결과, 금당 앞에 오층 석탑을 세워 1탑 1금당 형식의 가람 배치를 조성한 후 뒤에 석탑 3기를 다른 곳에서 옮겨와 추가로 배치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탑은 이중 기단 위에 세워진 삼층 석탑으로 면석과 몸돌에는 기둥이 새겨져 있고, 지붕돌에는 4단의 층급 받침이 새겨져 있는 등 통일신라 말기(9세기)의 전형적인 3층 석탑 양식을 띠고 있다. 1층 몸돌에는 문 그림을 새기고 그 안에 자물쇠와 고리를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이는 몸돌 안에 있는 사리공에 부처의 유골이 모셔져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이 탑의 상륜부는 없지만 균형 잡힌 비례와 체감, 우수한 조형성을 갖추고 있어 문화적 가치가 높다. 일제 강점기 부터 옆에 있는 탑은 관리 대상 문화재로 등록되었고, 이어 보물로 지정되어 관리되었던 것과 달리, 이 탑은 문화재로 지정이 되지 않았다. 해방 후에도 문화재 지정에 누락 되었다가 1973년에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 되었고, 2019년에는 보물로 지정이 되었다.(현장 안내 표지판 발췌)
@ 보령 성주사지 서 삼층 석탑
@ 보령 성주사지 서 삼층 석탑 안내판
@ 보령 성주사지 중앙 삼층 석탑
@ 보령 성주사지 중앙 삼층 석탑 안내판
@ 보령 성주사지 동 삼층 석탑
@ 보령 성주사지 동 삼층 석탑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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