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190

제119편 ; 주산 주렴산 기미독립만세 기념비

1. 들어가며 주렴산을 올라보니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일제강점시기에 일제의 핍박에 떨쳐 일어난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갈 즈음 서울에서 활동하던 지식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만세운동의 선두에 서서 불을 지폈었다. 우리 고향에도 산봉우리에서 만세운동을 하였던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성태산의 만세봉과 환산의 만세봉, 주렴산 국사봉 등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 당시 대부분 오일장이 서던 장날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기에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추진 하였으나, 왜경들의 감시가 심하여 산꼭대기로 올라가 횃불을 들고 소리를 쳐 주민들의 호응을 얻고, 왜경들에게 두려움을 주기 위한 방편으로 이런 식의 시위운동을 추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나라의 국권을 빼앗기고 고종의 국장일을 기해 전국적으로 만세운..

제118편 ; 주교 봉대산 봉수대

1. 들어가며 조선시대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서 전국 각 지방을 연결하는 도로를 구축하였다. 충청도는 서남부 지역을 연결하는 도로를 '이인도'라 칭하고, 부여-홍산-한산,서천 그리고 비인-남포, 공주-정산을 연결하여 9개 역을 관장하였으며, 서북부 지역에 '금정도'라고 칭하는 도로망을 청양-결성-홍주-보령-해미-서산-태안, 그리고 청양-대흥으로 8개 역을 관장하였다. 각 역에서는 파발마를 관리하여 공무로 이동하는 관원들에게 말을 빌려주어 빠른 시간에 전국을 연결하는 교통망을 구축하였다. 여기서 현재의 보령지역에는 이인도의 남포 남전역이, 금정도의 보령 청연역이 소역(小驛)에 해당되어 연결망의 한 축이 되면서 각 역마다 소로(小路)로 연결 되어 있었다.(제100편 ; 다산의 발자취로 본 '금정도' ..

제117편 ; 남포 경순왕 경모전

1. 들어가며 대천역에서 해수욕장으로 향하는 대해로를 따라 4.5km를 가면 좌측으로 남포면 제석리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인다. 마을길을 천천히 달리다보면 좌 우측으로 장승들을 세워 놓아 전형적인 농촌마을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듯 하다. 하지만 이곳도 도심의 물결이 스며드는지 주택의 형태가 농촌의 이미지를 벗고 현대적으로 변하여 가고 있는 듯 하다. 큰도로 마을 입구에서 약 1.2km 정도 들어오면 '경순왕 경모전 입구'라는 돌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그 농로길을 따라 약간 들어서면 스러져 가는 장승과 임도의 차단봉이 보인다. 시멘트 포장길의 경사로를 따라 조금 올라가다 보면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 가려진 솟을 대문이 보인다. 나즈막한 돌담으로 둘러쳐진 경모전은 하단부 주차장에서 한참 올려다볼 수 있듯이 ..

제116편 ; 웅천 구룡리 돌방무덤

1. 들어가며 이어니재를 넘어 웅천으로 들어서며 다리를 건너기 전 우측으로 개천길을 따라 들어가다보면 웅천돌문화공원이 나온다. 그 입구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집성당을 들르고 돌문화공원의 산책길을 따라 시비(詩碑)에 쓰인 글을 음미하면서 걷고 있었다. 석재 전시실을 지나 정자 쪽으로 발길을 하는데, 우측 잔디언덕으로 돌무덤의 표지판이 있어 다가가니 백제시대로 추정되는 유물이 복원되어 있었다. 표지판의 원소재지를 보니 구룡리이다. 구룡리에 확장 조성되고 있는 웅천산업단지로 인하여 이곳으로 이전하여 복원하여 설치한 것 같다. 화락산 줄기를 등에 업고 노천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석실분과 비슷한 형태의 돌방무덤을 한 구룡리 석실분도 백제 시대에 이곳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지방 호족세력이 웅천천의 넓은 경작지를 기..

제115편 ; 웅천읍 집성당(集成堂)

1. 들어가며 웅천읍 대천리 웅천초등학교 옆으로 하천을 따라 500여 미터를 가면 화락산의 동쪽 사면에 집성당(集成堂)이 있다. 집성당은 구한말 서원철폐, 강화도조약 등으로 조선사회의 유교적 가치관이 쇠락해지자 경기도 양주군 장흥에서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그리고 우암 송시열의 학문을 계승한 삼희당 윤석봉(三希堂 尹錫鳳)이 1888년 충청도 비인으로 재종숙 윤건오(尹建五)와 함께 가족을 데리고 낙향하였다가 1890년 웅천의 화정으로 이주하여 후학을 가르치며 호서지역의 남당학파와 학자들과 교류를 하면서 세우게 된 사우(祠宇)이다. 1898년 3월에 삼희당 윤석봉의 주도 하에 보령 지역과 서천, 홍성, 청양, 부여 지역의 유림들의 지원아래 세워졌으며, 창건에 앞장 선 이들로는 율농 신섭(栗農 申섭)과 돈간..

제114편 ; 성주 남포석의 채취 흔적

1. 들어가며 성주산 정상에 오르면 남사면이 뭉둥스럽게 잘려나가 있다. 자연환경을 치유 한다고 법면을 정리하고, 석축을 쌓고, 나무를 심어 놓았지만, 인간들이 자연을 파손한 흉터가 아무는 데에는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 흘러가야 할 것 같다. 성주산에 오르면서 이곳을 지나칠 때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땅을 파헤치게 되었는지 궁금하였는데, 아마도 벼루를 생산하기 위한 돌을 채취한 채석장의 흔적이 아닌가 싶다. 성주산은 아주 오래전에 바닷 속에 있었던 지층이 어느 시기엔가 융기를 하여 높은 산을 이루게 된 지형으로 바위에 자갈이 섞여 있는 퇴적암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퇴적암층의 일부는 사암으로 흑색의 실트층으로 구성되어 있어 예부터 비석의 재료로, 또 벼루의 원석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성주산의 백운사를 중..

제 113편 ; 웅천 구 마량진 성 (舊 馬梁鎭 城)

1. 들어가며 오천의 충청수영성은 수군절도사영의 휘하에 서해안 중요한 위치마다 속진(屬鎭)을 설치하여 해안 방어에 힘을 썼다. 충청 서해안의 속진으로 조선 500여 년간 소근진(태안), 당진포영(당진), 파지포영(서산), 서천포영(서천), 평신진(대산), 안흥진(안흥), 소근진(소원), 마량진(비인)이 구축되어 지속되고 있었다. 속진은 조선 초기에는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해상 방어의 큰 역활을 하였지만 임진왜란 이후에는 대륙정세의 불안정으로 한양을 방어하는 해상 전초기지 역활로 성격이 바뀌게 된다. 그 중에 마량진은 첨사가 거취하며 장항의 서천포만호영을 지휘하면서 충청수영의 남쪽 해안을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하는데, 마량진은 조선초기에 현재의 웅천읍 황교리 광암에 설치하여 운용되다가 후에 서천군 서면 마량리..

제 112편 ; 토정선생 관련 된 전설

1. 들어가며 토정 이지함 선생은 보령출신의 큰 인물로서 이 지역의 자랑이다. 청라면 장산리 출신으로 화암서원에 조카 이산보와 함께 위패가 모셔져 숭상을 받고 있으며, 특히 개경의 서경덕 선생으로부터 수학을 하였기에 풍수나 도학에도 큰 영향을 받아 전국을 돌아다니며 자연과 인간의 연관관계에 대하여서도 끊임없는 연구를 하였다. 일설에는 토정비결이라는 책자를 엮어 서민들에게 희망의 메세지를 전파 하였다고도 한다. 토정선생이 전통적인 성리학에 기반하여 실학적인 사상을 받아들이고 민생을 구원하고자 노력한 것은 현감으로 재직하면서 상부에 올린 상소문으로도 알 수 있겠다. 하지만 세상은 그의 뜻대로 이루어 지지 않기에 세상을 주류하면서 강산의 터에 더 관심을 갖게 된지도 모르겠다. 토정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가 이 ..

제111편 ; 왕대산의 채석장 흔적

1. 들어가며 서해고속도로를 따라 대천IC를 들어서기 전 간사지를 지나 우측으로 낮게 솟아 있는 산이 왕대산이다. 왕대산은 해발 122.7m의 높이로 화강암으로 형성된 바위산으로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망국의 한을 눈물로 달래다가 간 산이라 하여 왕대산(王臺山) 이라 불리운다. 이곳의 중턱에는 천년고찰 왕대사라는 절이 있으며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되는 미륵불이 암각으로 흐릿하게 조각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이 절을 찾는다. 그 절 밑으로 오래전에 설치하였던 임도(林道)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데, 도로부분에 자란 소나무의 몸통둘레를 볼 때에 50여년 이상의 수령이 넘을 것으로 추측이 되어 임도 설치시기가 아마 60년대 전후일 것으로 보인다. 이 임도의 잡목을 헤쳐 나가다보면, 왕대사의 축대 밑에..

제110편 ; 청고을에 남아 있는 고인돌

1. 들어가며 보령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고인돌은 72곳에 278기로 파악되고 있다.(대보문화6집 82쪽, 1997) 보령 전 지역에서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 고인돌을 지표조사를 통하여 그 당시까지 확인한 것이니 어디에선가는 농경지 정리 등으로 무심하게 사라진 유적들도 많으리라 본다. 그 중에 청고을의 고인돌은 1997년에 파악한 것은 3곳에 9기로 확인이 되는데, 황룡리에 2기, 신산리에 1기, 의평리에 6기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 황룡리 고인돌 ; 청라면 황룡리 사거리들에 있는 2기의 고인돌이다. 하부는 자갈, 상부는 참흙으로 된 퇴적층 위에 있다. 이곳은 오서산 아래에 펼쳐진 평탄 대지의 하부로 주변에는 넓은 평지가 있고, 100m 남쪽에는 하천이 흐른다. 해발고도는 60m정도이다.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