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성주산 정상에 오르면 남사면이 뭉둥스럽게 잘려나가 있다.
자연환경을 치유 한다고 법면을 정리하고, 석축을 쌓고, 나무를 심어 놓았지만, 인간들이 자연을 파손한 흉터가 아무는 데에는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 흘러가야 할 것 같다. 성주산에 오르면서 이곳을 지나칠 때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땅을 파헤치게 되었는지 궁금하였는데, 아마도 벼루를 생산하기 위한 돌을 채취한 채석장의 흔적이 아닌가 싶다.
성주산은 아주 오래전에 바닷 속에 있었던 지층이 어느 시기엔가 융기를 하여 높은 산을 이루게 된 지형으로 바위에 자갈이 섞여 있는 퇴적암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퇴적암층의 일부는 사암으로 흑색의 실트층으로 구성되어 있어 예부터 비석의 재료로, 또 벼루의 원석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성주산의 백운사를 중심으로 지질학 상 백운사층의 지질을 구성하여 벼루 원석 채취 광산으로 오래 전부터 개발 되기도 하였는데, 이 남포오석을 현지에서는 '백운상석(白雲上石)'으로 불리우는데 이는 성주산 백운사 뒷편에서 나기 때문이다.
현재는 성주산 줄기의 채석장은 거의 폐쇄되고 주로 웅천읍 평리 주변에서 채석광산이 개발되고 있는데 이를 총칭하여 남포석으로 불리우고 있으며 미산, 성주지역이 조선시대에는 남포현에 해당되어 그렇게 불리우게 된 것이다.
보령은 이 석재를 이용하여 오래전부터 비석을 만들었는데, 성주사의 백월보광낭혜화상비 또한 천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글자 한자한자 풍화되지 않고 보존 된 것도 이 지역 남포오석의 특성을 잘 말해 준다고 하겠다.
벼루 또한 중국에서 생산되는 단계연(端溪硯)이나 흡주연(翕州硯)에 못지 않는 품질로써 옛 선비들의 선호 문방구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고려 및 조선시대에 중국으로 사신을 보낼 때에는 꼭 남포벼루를 진상 품목으로 정하여 교류상품으로 큰 역활을 하였다고 한다. 송나라의 봉사고려국신서장관(奉使高麗國信書狀官)을 수행하던 서긍(徐兢)이 1103년 고려에 왔다가 이후에 편찬한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벼루'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로보아 당시에도 벼루라는 말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 硯曰皮盧."에서 연(硯은 벼루)은 피로(皮盧 ; 현재 중금발음으로는 피루)라 한다는 것에서 확인이 된다.
보령의 벼루 제작은 17세기 이후 본격화되기 시작된 것으로 추측되며, 보령시 화산동과 인근 청라면 향천리, 의평리 지역에서 50여호가 일제 강점기시기 부터 벼루제작업에 종사하였다. 화산동의 송병요(宋秉堯, 1876~1935)와 김갑룡(金甲龍, 1904~1935)이 대표적인 장인으로 전해진다. 김갑룡은 아버지인 김형수에게 사사받아 아들인 김진한(金鎭漢, 1941~)에게 전수하여 보령 남포벼루제작 기술이 이어지고 있다.
충남 무형문화재 제6호 보령 남포 벼루 제작 기는보유자로 지정된 김진한은 어릴때 부터 남다른 손재주가 있어 벼루제작 가업을 3대째 이어 오고 있는데, 조부인 김형수는 1890년대 서천에서 처가인 청라로 이주하여 다딤잇돌과 소량의 벼루를 주문제작하여 생산하며 우수한 품질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보령 남포 벼루제작, 선인, 국립민속박물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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