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 113편 ; 웅천 구 마량진 성 (舊 馬梁鎭 城)

푸른나귀 2020. 12. 14. 12:37

1. 들어가며

 

   오천의 충청수영성은 수군절도사영의 휘하에 서해안 중요한 위치마다 속진(屬鎭)을 설치하여 해안 방어에 힘을 썼다.

  충청 서해안의 속진으로 조선 500여 년간 소근진(태안), 당진포영(당진), 파지포영(서산), 서천포영(서천), 평신진(대산), 안흥진(안흥), 소근진(소원), 마량진(비인)이 구축되어 지속되고 있었다.

  속진은 조선 초기에는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해상 방어의 큰 역활을 하였지만 임진왜란 이후에는 대륙정세의 불안정으로 한양을 방어하는 해상 전초기지 역활로 성격이 바뀌게 된다.

  그 중에 마량진은 첨사가 거취하며 장항의 서천포만호영을 지휘하면서 충청수영의 남쪽 해안을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하는데, 마량진은 조선초기에 현재의 웅천읍 황교리 광암에 설치하여 운용되다가 후에 서천군 서면 마량리로 옮기게 된다.

  서천으로 진을 옮기게 된 이유로는 웅천의 마량진은 웅천천을 따라 깊숙한 곳에 진이 설치되어 군선을 은폐시키기는 좋은 조건이나 조석간만의 차이가 심하여 썰물 때는 배를 뛰우기 어려운 단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조선 후기(1655년)에는 간만의 차이가 적은 서천의 비인으로 옮기게 된다.

  마량진이 옮겨 가면서 마량진이라는 지명까지 비인으로 옮겨가고, 웅천의 마량진은 구진(舊鎭)이라는 지명으로 남게 되었다.

 

   구진(舊鎭)은 웅천천 하구 광암에 설치 하였는데, 설치의 큰 이유는 백제시대부터 웅천천을 따라 부여까지 들어갈 수 있는 주요한 교통요지였기에 왜구들의 침입이 빈번하여 수군진의 필요성이 컷기 때문이다.

  마량진의 위치로 웅천천 하구의 88m 야산이 바다를 조망하기 좋고, 만입구로 뻗은 산줄기(과녁쭉불)가 방파제 역활을 해 파도가 조용해지기에 안전하게 정박을 할 수 있어 조석간만 차이로 인한 뻘의 불편함도 감수하였던 것이다.

  1510년 축성된 마량진성은 높이 9척, 길이 1371척으로 삼태기 모양의 돌로 성을 쌓았다.

  현재 약 660m 정도로 흔적이 남아 있고, 바다와 접한 남쪽벽은 기단부가 남아있다.

서천의 마량진은 성을 축조하지 않고 진을 운용하였기에 더욱 구진의 성벽흔적은 보전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2. 구마량진 성

 

     * 위치 ;  보령시 웅천읍 황교리 820번지 일대

 

 이 곳은 조선 초 충청수영 휘하 수군첨절제사(종3품)의 주둔지로 충청남부 해안의 왜구방어와 조운선의 안내, 보호를 하던 곳이다. 그러나 수심이 낮아 군선 정박이 불편하여 성종때 부터 이전 논의가 있어 오다가 효종 6년(1655) 충청수사 김한문의 요청으로 서천 마량리로 옮겨 이곳은 구진(舊鎭)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이 성은 1510년에 쌓은 석성으로 둘레 1371척, 높이 6척이며 성안에 우물이 하나 있었다.

 약 70m의 이 산 정상부에서 남사면쪽을 둘러싼 경사가 급한 산성으로 삼태기형에 가깝다. 성곽에는 동문지,서문지와 옹성 흔적 그리고 동서 북벽 중앙에 치(雉)가 있으며 성내에는 건물지가 남아있다. 현재 길이는 약 650m, 높이는 3~5m 정도이며 자연석으로 쌓았고, 내탁을 하여 쌓았다. (현장 안내판 참조)

 

 

 

  @ 황교리 614번지 구마량진성 입구

  @ 칡과 수수대로 가려진 마량진 성의 일부분

   @ 구마량진성 안내판

  @ 부사방조제의 설치로 간사지로 변한 구마량진 앞

  @ 부사방조제의 설치로 간사지로 변한 구마량진 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