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보령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고인돌은 72곳에 278기로 파악되고 있다.(대보문화6집 82쪽, 1997)
보령 전 지역에서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 고인돌을 지표조사를 통하여 그 당시까지 확인한 것이니 어디에선가는 농경지 정리 등으로 무심하게 사라진 유적들도 많으리라 본다.
그 중에 청고을의 고인돌은 1997년에 파악한 것은 3곳에 9기로 확인이 되는데, 황룡리에 2기, 신산리에 1기, 의평리에 6기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 황룡리 고인돌 ; 청라면 황룡리 사거리들에 있는 2기의 고인돌이다. 하부는 자갈, 상부는 참흙으로 된 퇴적층 위에 있다. 이곳은 오서산 아래에 펼쳐진 평탄 대지의 하부로 주변에는 넓은 평지가 있고, 100m 남쪽에는 하천이 흐른다. 해발고도는 60m정도이다.
2) 신산리 고인돌 ; 청라면 신산리 143-3번지의 서북쪽 끝 도로변에 1기의 고인돌이 있다. 이곳은 낮은 구릉의 말단부로 구릉과 평지가 접하는 곳이다. 해발고도는 110m정도이지만 주변과의 차이는 3~4m밖에 되지 않는 언덕이다.
3) 의평리(벌정자) 고인돌 ; 청라면 의평리 가느실 마을 앞 청천저수지 안에 있는 고인돌이다. 청천저수지 축조전에 벌정자라는 마을이 있었고, 큰 은행나무가 있었다. 이 은행나무 그루터기 옆에 5기, 동북쪽으로 350m쯤 떨어진 곳에 1기가 있다. 고인돌 주변에는 자갈무더기를 이루고 있다. 고인돌이 있어 논으로 개간하지 못하여, 논에서 나온 돌을 모아 놓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곳은 해발 35m정도이며 청라천의 범람원으로 평평한 퇴적지형인데 하천에 의해 운반된 자갈이나 모래로 구성되어 있다. ( 대보문화6집 57쪽, 1997)
위의 내용으로 보아 의평리에 있던 고인돌은 청천저수지의 축조로 수몰되어 있는 듯하며, 현재 볼 수 있는 고인돌은 황룡리와 신산리 고인돌 3기에 한하게 되었다. 그러나, 근래에 국도 36호의 확장공사로 화산동에서 옮겨온 향천2 교차로 옆 도로공원에 1기의 고인돌이 있으니 4기가 존재한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이중에서 황룡리에 있는 고인돌 2기는 논 한가운데 있어 추수가 끝난 오늘에서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보령의 마을지 '보령 황룡리'(보령문화원, 신재완,2020)에 의하면,
0. 황룡리 1호 고인돌 ; 황룡리 858-1에 위치한 고인돌로 주민들은 배바위라고 부른다. 퇴적암인 편마암으로 덮개돌이 430*320*46cm으로 둘레 1270cm 크기이다. 상부는 평편하고하부는 가운데가 약간 볼록한 형태이며, 둘레에는 다듬은 흔적이 뚜렷하다. 동북쪽이 좁고 높으며 남서쪽이 넓고 낮아 배 모양이다. 긴 방향은 북동-남서이다. 굄돌은 2개 있는데 넓고 평평하다. 굄돌은 덮개 방향과 일치하는데 북서쪽의 것은 240*95*30cm로 수평의 층리를 가졌다. 남동쪽의 것은 195*97*30cm로 수평의 층리를 가졌다. 굄돌이 동북쪽으로 치우쳐저 있어 덮개돌의 동북쪽이 들리고, 서남쪽으로 땅에 닿아 5도쯤 기울어져 있다. 덮개돌의 동북쪽 밑에는 수직으로 세워진 수직 층리를 가진 35cm의 돌이 있는데 정확한 길이와 높이는 알 수 없다. 이 돌 위에도 30*20cm 크기의 돌이 약간 노출되어 있다.
경지정리 공사 때 홰손 될 위기가 있었으나 마을 주민들이 적극 원형대로 유지 할 것을 주장하고 노력하여 원형대로 보존 되었다.
0. 황룡리 2호 고인돌 ; 황룡리 839-1에 위치하는 고인돌로 주민들은 돛대바위라고 부른다. 1호 고인돌 북동쪽으로 110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원래 서 있었는데 누군가 넘어트렸다는 전설이 있다. 덮개돌은 425*225*30cm, 둘레 1010cm 크기의 평편한 모습이며 남쪽 부분이 두 조각으로 갈라져 있다. 동서 방향으로 긴 형태이다.
위의 글에서 위치 비정이 정확하지가 않다. 현장 확인하여 보니 1호 고인돌은 843-2번지이며, 2호 고인돌의 위치는 840-3번지다. 610번 지방도를 따라 옥계초등학교에서 대천농협 옥계지점 방향으로 가다가 왼편 들판의 논 한가운데 위치하여 농번기에는 벼들에 의해 잘 보이지 않는다.
아래 전설에 의하고, 구전에 의하면 돛대바위가 선돌이라면 고인돌과는 다른 의미에서 가치가 클 것이니 좀 더 확인해 보아야 할 것이다.
2. 배 바위에 얽힌 전설
* 고인돌 위치 ; 배 바위 ; 보령시 청라면 황룡리 843-2
돛대 바위 ; 보령시 청라면 황룡리 840-3
보령시 청라면 황룡리 782번지에 200여년 전 평산신씨(平山申氏) 후손이 해좌사향(亥坐巳向)으로 기와지붕에 목조 건평 40평의 대가를 짓고 많은 노비를 거느리고 살았다. 그는 4천석군의 부자였으며, 매일 수 십명의 손님들이 끊임없이 찾아와 노비들은 매일 가용주(家用酒) 거르기에, 손에 진물이 날 지경이었다. 일설에서는 뒤꼍에서 술이 솟아 나왔다고도 한다. 선대에는 일년에 두차례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쌀 300석씩을 나누어 줄 정도로 덕이 있었으나 그 후손은 아주 인색하였다.
이 집터는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유명한 명당인 평사락안(平沙落雁 ; 기러기가 갯벌에 내려 앉는 형국) 이라 하였고, 집 앞 들에는 웅장한 배바위와 돛대바위가 있고, 그 앞에는 옹달샘이 있었다. 아침에는 노비 수십명이 물동이를 이거나 물지게를 지고 식수를 나르는 것이 마치 배바위에서 짐을 하역(荷役)하는 모습이라 부자가 아니 될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날 이 부자집에 스님이 시주를 달라하니 " 나는 불교를 숭상하지 않으니 돌아가시오." 하였다. 중은 이말을 듣고 돌아갔다가 다음 해에 또 와서 시주를 달라 하였다. 주인은 또다시 거절하니 중이 말 하기를 "그러면 날이 저물었으니 하룻밤만 재워 주시오." 하였다. 주인은 그것도 물리칠 수가 없어 마지못해 승락하여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날밤 부잣집의 늙은 노비가 저녁 밥상을 들고 들어와 스님에게 저의 손이 술지검(농주의 건더기) 짜기에 짓물러 살 수가 없으니 제발 이 일을 면하게 하여 줄 수 없느냐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스님은 주인의 괄세와 늙은 노비의 고통을 생각하고, 주인의 생활을 어렵게 해 줄 요량으로 풍수지리적으로 배가 못 들어오게 할 것을 결심 하였다. 하룻밤을 잔 뒤 주인을 찾아 잘 자고 잘 먹고 가니 그 보답을 하겠다고 하면서 저 앞 배바위가 짐을 가득 싣고 와 있는데 나갈 준비를 하고 있으니 못 나가게 배의 돛대를 부러트려 눕히면 재물도 영원히 간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에 주인은 즉시 석공을 불러 서 있는 돛대바위를 정으로 쪼아 넘어트렸다.
그 후부터 차츰 재산이 줄어 타성(他姓)에게 집과 논밭을 모두 매각하였다고 한다. 그후 여러 주인이 바뀌었다가 기와집은 보령시 죽정동 盧씨가 매입하여 죽정동에 옮겨졌으나 그 터는 현대식 건물이 지어져 타성이 살고 있다. 그러나 평산신씨 후손들은 그 일대에서 부유하게 살고 있다. (대보문화6집, 234쪽, 배바위 전설, 이봉주,1997)
@ 배바위의 남측면
@ 배바위의 북측면
@ 배바위의 동측면
@ 돛대 바위의 남측면
@ 돛대 바위의 북측면
@ 돛대 바위의 서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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