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107편 ; 명천 이문구선생의 집필 터

푸른나귀 2020. 11. 9. 14:05

1. 들어가며

 

  '60년대 청천저수지의 축조로 인해 화암서원이 있던 마을이 수몰 되면서 장산리는 두개의 마을로 확연히 분리되는 현상이 있었나 보다.  내 기억으로는 아랫장골에서 윗장골까지의 아이들이 모두 청라초등학교에 입학하여 같이 다닌 기억은 있는데, 지금의 보령병원에서 부터 주포로 넘어가는 질재를 끼고 형성된 화암서원 마을의 장산리 아이들이 기억에 없다. 

  현재의 화암서원에서 조금 옥계쪽으로 가면 시궁골이 시작되는데 이곳부터가 옥계리에 속하여 아마 이곳 장산리 아이들은 저수지의 수몰로 장현리, 신산리, 옥계리 아이들과 함께 옥계초등학교에 다닌 것으로 추측이 된다.

오서산 골짜기 물을 받아 황룡천이 흘러 오면서 석우천, 길현천, 옥계천과 합류하여 화암서원쪽으로 내려오면 건너편 장골마을의 냇물과 질재 고개밑 절골저수지에서 흘러 내려오는 개울물이 합류되어 화암서원 앞 저수지의 수량을 풍부하게 하여 낚싯꾼의 명당으로 자리매김도 하여 사시사철 조사들이 모여든다.

 

 명천 이문구는 1989년 1월에 토정 선생이 태어난 이곳의 폐가를 구입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창작활동을 하였다.

 이곳에서 1990년 '산너머 남촌'을 창작과 비평사를 통해 발간하였고, 1992년 '매월당 김시습'을 문이당을 통해 출간을 하면서 농촌소설에서 역사소설로의 자리매김을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무렵 이문구의 집필실이 폭우로 인해 지붕이 망가져 살수 없는 지경이 되자 지역 독지가(신홍식씨)의 지원을 받아 폐 농가를 헐고 조립식으로 다시 지었다.  '매월당 김시습'은 그  당시 독자들의 반응이 좋아 40여만부를 판매하기도 하였다.

 

 명천 이문구가 이곳에서 집필 활동을 한것이  2003년 지병으로 타계하여 관촌마을 부엉이 우는 솔밭에 한 줌 흙으로 돌아 갈까지 10여 년 넘게였다.

 그도 어려서 고향을 떠나(1959년)  관촌마을이 아닌, 선대 이지함선생의 품으로 돌아오게(1989년) 된 사유도 알 듯하다.

  벌써 그가 솔부엉이 곁으로 떠난지 강산이 두번 변할 시간이 되어 버렸다.

  작년 이맘 때 이곳을 지나치며 집필실을 둘러 보았을 때는 그나마 집 앞의 잡초를 제거하여 말끔 한 듯 보이더니 올해는 잡초에 공허하게 무덤이 되어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떠나고 문학관이다 기념관이다 말도 많더니 공허한 그림자만 집필실 지붕위로 떨어진다.

 이 부지 또한 개인의 소유일 것이니 언제인가는 기억 속에서 사라질 것이라 생각하니 안타깝다.

 

     위치 ;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731  

 

 

  @장산마을회관 앞에서 바라본 집필 터

  @ 잡초에 뭍혀있는 집필 터

  @ 집필터 앞 이정표

  @ 청천저수지의 가을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