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보령땅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낸 5~60대 이상의 장년층이라면 아마 '광천 쪽다리'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조그만 말썽이라도 피운 날이면 부모님들은 으레 ' 너는 광천 쪽다리 밑에서 주워 왔으니까, 말썽을 피울려면 네 친엄마 찾아가라. 쪽다리 밑에 가면 엿 파는 네 엄마가 있을 터이니 거기서 맛있는 엿도 먹고, 네 마음대로 놀아도 되니 거기로 가!'.
동네 모든 아이들이 이런 말을 들었으니 어쩌면 그 엿장수 아주머니는 모든 보령땅 아이들의 친엄마가 된다는 이야기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아이를 낳았을까 하는 농담과 보령의 모든 아이들은 친형제라는 농담 마저 던지기도 하였다.
50년도 훌쩍 지나간 세월 속에 아마 보령에서 광천시장으로 가는 국도길에 콘크리트 다리가 있기에 그 다리를, 아이의 탄생이 다리 가랑이 사이에서 태어나는 것을 비유하여 훈육의 차원에서 '광천 쪽다리'의 이야기를 엮어내지 않았는가 하고 생각했었다.
그래도, 그 이야기가 보령땅에 크게 퍼졌을 때에는 근거가 되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는 궁금증으로 자료를 찾아 보았다.
광천읍의 지리적 배경은 동북방향에서 서남방향으로 오서산(791m)이 완만한 능선으로 산자락이 펼쳐저 풍부한 수량을 함유한 광천천이 읍내를 휘감고 서쪽 큰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형태이다.
즉 내륙 깊숙히 서해바다의 풍부한 어족자원을 받아 들일 수 있는 해산물과 내륙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이 교역될 수 있는 상업적 배경이 예로부터 조성이 된 것이다.
일제에 의해 철도가 부설되고 국도가 건설되어 대천에게 상권을 빼앗기기 전까지, 즉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광천은 광천천에 의해 강경시장 못지 않은 큰 시장을 형성하고 있었다.
광천천은 오천 앞바다에서 조석간만의 차를 잘 이용하면 약 10km 떨어진 광천의 옹암리 독배까지 큰배가 들어갈 수가 있다. 또한 조그만 판옥선은 소암리 왕배나무까지 올라가기도 하였다.
옹암리 독배는 지금의 광천역이 생기기 전까지 서해에서 들어오는 어물들로 시장이 크게 들어섰던 곳으로 구시장이라고 불려진다. 지금도 새우젓을 파는 상점들이 들어서 있고, 주차장 한켠에는 육군상무사(보부상)의 안내판이 그 시절을 기억하는지 외롭게 서있다. 제방을 넘어서면 시민들을 위한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는데, 그 곳이 예전에 수많은 배들이 정박하던 곳이었고 주차장을 비롯한 길건너 젓갈 상점들이 그 '광천에서 돈자랑 하지 말라'는 광천장의 옛 터인가 보다.
조선시대에는 보령과 안면도의 앞바다를 관장하던 관이 홍주였기에 앞바다의 원산도, 삽시도, 어청도, 외연도를 비롯한 남쪽의 홍도 등에서도 어선들이 이 옹암포를 이용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보령방조제를 설치하여 수로를 이용한 어선들의 출입이 불가능해져 옛 이야기가 되었지만, 광천사람들은 수로가 열리고 언젠가는 그 영화롭던 시절이 다시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광천 쪽다리'가 어딘지 찾아보니 두 곳으로 추측을 하고 있었다.
한 곳은 독배마을에서 광천으로 나가는 광천천 위에 건설된 '옹암교'를 지적한다.
예전에 광천시장으로 들어서는 큰 다리로 그 밑은 부랑아들이 거취하기에 충분하고, 광천이 번성하던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오가던 다리임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쪽다리라 불렸을 당시에는 일제강점기 전부터이니 타당성이 결여된다.
다른 한곳은 왕배나무 근처를 말하고 있다.
왕배나무는 느티나무로 소암리 광천천 바로 옆에 위치하는데, 이 나무는 수령이 440년, 수고 18m, 나무둘레 6.5m로 밑 줄기가 큰 바위를 휘감으며 연륜을 눈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옹암포(독배)가 융성할 때, 작은배들은 이곳까지 들어와서 배를 묶어 놓았다고 해서 왕배나무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현장을 답사 해보니 하천과 가까워 가능성이 짙다.
지나가는 주민 아주머니를 만나 쪽다리의 위치를 물어보았는데, 결혼하여 50년이 넘었지만 이야기로 여기에 있었다고 전해 들었을 뿐 실제로 본적이 없다고 하였다.
하기사 조선이 일제가 강점한 시기가 100년이 넘는데 실물을 본다는게 가능한 것도 아님을 모르는바가 아니다.
쪽다리의 위치는 이 왕배나무의 약간 위쪽(약50m) 하천에 있었다 한다.
조선시대의 다리라 함은 보령의 한내 돌다리처럼 돌기둥위에 판석을 깔아 우마차가 다닐 수 있게 건설되는 것은 관청(관아)에 의하지 않고는 힘든 일이다. 그러므로 이 쪽다리는 아마 징검다리처럼 돌을 쌓고 판재를 얹어 행인이 다닐 수 있게 만들었기에 이름을 쪽다리라 하지 않았을까?
왕배나무 옆으로는 평평한지대가 있어 작은어선들이 이곳에 정박하고 어물을 풀면 청양, 예산, 보령, 홍성의 소상인들이 모여들어 광주리에 이고, 지게로 지면서 산간 고을 곳곳으로 어물들을 팔았을 것이다. 그러면서 소암포구도 옹암포구 못지않게 서민들을 위한 거점시장으로 인근동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쪽다리 아래에 있는 왕배나무 밑에서 엿판을 벌려놓고 엿을 팔던 아낙도 있었을 것이고, 그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구전이 되면서 쪽다리 밑 엿장수 아줌니가 친엄마로 자리매김을 한 것은 아닌지 왕배나무는 알고 있을 것 같다.
@ 왕배나무 위치 ; 광천읍 소암리 328-2
@ 바위를 품은 왕배나무
@ 왕배나무 안내판
@ 독배마을 옹암교
@ 독배마을 전경
@ 옹암포구의 현재모습
@ 주차장 한켠 보부상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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