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보령에는 다른지역 보다도 유별나게 곳곳에 詩碑가 많다.
보령에 문인(詩人)들이 많아서 그런 것도 아니고, 문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서도 아니고, 아쉽게도 예부터 질 좋은 석재가 생산되어 비석이나 건축자재로 많이 쓰였기에 석재산업이 발달한 이유가 클 것이다.
그 많은 시비 중에 특별히 눈에 띠는 성주산 휴양림 입구에 서 있는 도선국사의 칠언고시(七言古詩) 시비가 오가는 산행인의 마음을 촉촉하게 적시기에 그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는 신라말엽의 승려로 신라가 멸하고 고려가 흥할 것이라는 예언으로 잘 알려져 있어, 우리나라 풍수지리학의 역사가 도선으로부터 시작 되었다고 평하고 있다.
'성주사'라는 시를 읽어보면 작자가 이곳을 다녀가지 않고는 시상이 이렇게 떠 오르지 않을 것이니 어느 시기인가 도선국사가 이 보령땅에 발자취를 남겼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도선국사가 보령지방을 둘러본 후에 오서산과 성주산 사이 비옥한 땅에서 만대에 걸쳐 재난없이 풍요와 번영을 이룬다는 '오성지간 만세영화지지(嗚聖之間 萬歲榮華之地)'라 하였다 하니 더욱 보령땅을 거쳐간 흔적이 역력하다.
신라 말엽 선종의 구산선문 중에 성주사는 무염대사(800~888)가 크게 성주산문을 일으켰는데, 무염은 선종의 창시자 '보리달마'로부터 7대인 마조(馬祖)의 제자 보철에게 이어지는 계보를 가지고 있고, 도선국사는 마조의 제자 지장(735~814)에게서 수행한 태안사 동리산문의 혜철(785~861)에게서 제자로 수행을 하였다.
무염대사는 822년 당나라로 승려유학을 가 남선종을 익히고 845년 귀국 하여 성주사를 중창하였으며, 도선국사의 스승 혜철(惠哲)은 814년 당나라에 들어가 지장의 선법을 듣고 839년 귀국하여 전라도 곡성의 동리산에 들어가 태안사(泰安寺)를 창건하였다.
혜철의 제자로는 여(如), 윤다(允多,864~945), 도선(道詵), 경보(慶甫,868~945) 등이 있다.
도선은 15세에 출가를 하여 화엄사에서 화엄경을 배우고, 20세에 동리산에 들어가 혜철의 제자가 되었으며, 그의 풍수지리설은 고려의 개국과 함께 왕건의 추앙을 받아 고려개국의 기틀이 되는 '훈요십조'에 반영이 되었다.
도선국사가 보령땅에 들렀을 가능성은 위에서 말한 嗚聖之間 萬歲榮華之地와 성주사라는 詩文, 그리고 불승으로 전국의 명소를 둘러보고 裨補風水의 개념을 설파한 인물이며, 특히 스승인 혜철과 성주사의 무염이 당나라의 마조의 선종을 이어 받았으니 혜철의 제자로서 무염대사가 설법을 행하는 성주사에 아니 들렀을 수 없겠다.
각 스님의 歿년도가 무염 888년, 혜철 861년, 도선 898년으로 동시대를 살아간 불제자들인 것이다.
2. 성주사 시비
* 위치 ;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산 39 (성주산 휴양림, 화장골길 57-228)
聖住山 (도선국사)
行行 聖住山 前路(행행 성주산 전로)
가며 가며 길트인 깊은 성주산
雲雲 重重 不暫開(운운 중중 불잠개)
구름 안개 겹겹이 쌓여 있는곳
看取 牧丹 何處折(간취 목단 하처절)
모란 줄기 어드메 꺽어 진건가
靑山 萬疊 水千廻(청산 만첩 수천회)
푸른 산산 첩첩이 물 천번 흐르네
( @ 도선국사의 이 시는 '朝鮮환輿勝覽' 보령군편 山川의 성주산에 기록되어 있다.2020.12.14확인)
성주산 화장골 (이필선)
구름 안개
산허리 꺽어 흐르고
계곡 흐르는
시냇물 소리 아득한데
산새들의 지저귐이
화장골 새벽을 연다.
촉촉히 젖어오는
얼굴에
벗나무 우거진 산책로 따라
맑고 고운 심성
들이쉴 수 있으니
예가
무릉도원이 아니런가?
(첨언 ; 도선국사의 詩에 내 졸작을 얹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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