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 106편 ; 아계 이산해의 유택

푸른나귀 2020. 10. 30. 19:55

1. 들어가며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 1539~1609)는 보령과 관련이 깊다.

  그의 할아버지 이치(李稚)가  김성우장군의 3세손 김맹권의 딸과 혼인하여 보령의 입향조가 되는데,  이치의 둘째아들인 지번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치의 넷째 아들이 토정 이지함선생이니 이지함은 이산해의 작은아버지가 된다.

  광성부원군 김극성은 김맹권의 아들로 이치와는 처남, 매부지간이 되므로 광산김씨의 세거지인 청라동 장산리 담안마을, 서원마을(청천저수지 설치로 물에 잠김)에 한산이씨가 자리를 잡게 되는 계기가 된다.

 조선시대 중기까지는 재산의 분재(상속)에 있어서 남녀 차별이 없는 균등한 분배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많은 씨족들이 외가쪽 마을에 정착할 수 있었다.

  이산해는 한양에서 태어났는데 아마도 아버지의 관직에 의해 그곳에서 태어난 것 같다. 그러나, 1545년 을사사화로 집안이 화를 입게되자 보령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산해의 나이가 6세이다.  재주가 뛰어난 이산해는 장산리에서 작은 아버지 토정 이지함 선생으로부터 학문을 익히게 된다.

  1558년 진사에 합격하고, 1561년 문과에 급제 하였으니 성장기에서 청년기에 이르는 많은 시간을 청고을에서 지냈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아계 이산해의 삶에 대해서는 호, 불호(好, 不好)가 명확하게 갈리어 후세 사람들이 평하고 있다.

영의정이라는 높은 관직에까지 오르면서 국가 경영에 영향을 주었지만, 파당으로 인한 당파의 영수로 욕을 먹기도 한 것이다. 한양에서 운명을 마치고 청고을이 아닌 이곳으로 묘택을 정한 것은 예산지역에서도 깊은 산골로 명당으로서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었는지 그 아래 동네로 한산이씨들의 세거지가 형성되어 지금도 그 후손들의 고택으로 수당 이남규 선생 고택과 이광임 선생 고택이 남아 있다.

 보령읍성의 관아문 현판 글씨 '해서루(海西樓)'도 이산해의 친필로 전해지고 있다.

 

 

2. 이산해의 묘

 

       *  위치 ;  예산군 대술면 방산리 산 7-1

       * 지정 ;  충청남도 기념물 제184호

 

      이산해의 묘는 조선 선조때 영의정을 지낸 정치가이자 문장가인 이산해와 그의 부인 양주조씨의 합장묘이다.

  이산해의 본관은 한산이고, 자는 여수(汝受)이며, 호는 아계(鵝溪)이다. 이산해는 '토정비결'을 쓴 작은아버지 이지함(1517~1578)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561년 문과에 합격한 뒤 이조와 병조판서를 비롯해 삼정승을 두루 거쳤다.그림과 서예를 모두 잘하였고,문장에도 뛰어났다. 이산해가 쓴 책으로는 '아계유고(鵝溪遺稿)'가 있다.

 무덤 주위에 있는 여러 석물은 모두 광해군이 즉위한 1609년에 묘를 조성할 때 세운 것이며, 이산해의 업적을 기록한 비석은 1856년(철종7)에 새로 만들어서 무덤 왼쪽에 세웠다.묘역으로 올라가는 입구에는 풍수지리적으로 묘의 위치를 보완하기 위해 이산해의 아들 이경전과 사위 한음 이덕형이 연못을 만들었다고 한다. (묘역 안내 표지판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