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오서산 줄기가 남쪽으로 치맛자락 펼치듯 품을 내주어 황룡천을 따라 넓은 벌판을 형성하여 물산의 생산이 충분하여 옛부터 주민이 살기 좋은 동네를 만들어 주었다. 장현리로 들어서면 은행마을의 평산신씨의 신경섭 전통가옥이 있으며, 그 위쪽으로 안동인 김이철이 지은 가소정이라는 정자가 있으니 예부터 많은 토족 양반들이 거주하여 왔음을 알 수 있겠다.
특히, 한산이씨는 수몰된 서원마을 부근의 광산인 김극성과 연계되어 이치를 위시하여 이지번, 이산해, 이산보, 이지함 등의 유명인을 배출한 세족으로 이 땅에 터를 확고하게 다지게 되었다.
토정선생의 선산이 고정리 보령화력 부근에 있는데, 유독 이지번의 아들인 이산해와 이산보의 유택이 예산과 명대계곡에 위치하여 계파를 달리하여 소종중으로 이어가고 있음에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였다.
또한, 명대계곡의 육소나무인 귀학송을 보면서 이산광이 귀향하여 정착하면서 지었다는 귀학정의 위치에 대해서도 궁금하여 그곳에 살아왔던 친구의 친구를 통해 대충은 짐작하는 계기가 근래에 있었다.
그에 의하면 이산광이 내려와 집을 지었다는 위치가 그 후손이 운영하였던 귀학정사라는 음식점의 위치이며, 그 옆 냇가에 위치하여 귀학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귀학정이 있던 자리에는 예전에 기와조각과 목재로 쓰였던 폐목들이 둥굴러 다녔다고 하나 지금은 그 형체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귀학정사가 있던 자리에 고택이 있었는데, 그 바깥 사랑채에는 '이군산방(李君山房,李氏山房)'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李君山房은 소동파의 친구인 이상(李常)과 관련된 고사로 후학들을 위해 수많은 책을 남기어 공부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아마 동계 이산광이 혼탁한 정계를 떠나 그의 조상들이 터를 잡은 장산리 윗쪽 명대계곡으로 내려와 귀학정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을 보탰나 보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그가 살던 옆으로 유택을 정하니 그 후손들은 동계공파라는 소종중으로 후손들을 이어가고 있다.
형인 아계 이산해는 예산군 대술면에 유택이 설치되고 후손을 이어가고 있으니, 아마 그곳도 파를 달리하여 모시고 있는 것 같다.
귀학송과 어울리는 귀학정이 남아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시대의 자료를 찾을 수 있다면 복원하여 아랫동네의 서민적인 '가소정' 정자와 더불어 조선시대 양반가의 삶의 면모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귀학정은 고택이 있던 자리에서 약간 위쪽으로 계곡이 굽이쳐 도는 곳에 지금으로 부터 약 50여년 전에 허물어질 것을 염려하여 그 후손들이 주부재를 모아 놓고 이엉으로 덮어 놓았다고 한다. 하지만, 재축을 하지 못하여 자재들은 썩어 없어진 것으로 아쉬움이 남는다. 귀학정에는 '귀학정(歸鶴亭)'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글씨는 추사 김정호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고택에 걸려 있던 '이군산방(李君山房)' 역시 추사의 글로 두 현판 액자는 그 주변에 살고 있는 후손이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불과 한 두세대 전의 정자였다면 복원에 필요한 사진 등의 자료가 있을텐데 옛 조상들의 삶을 유추할 수 있는 유산으로 발굴할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지역 문화재로 스토리텔링의 충분한 활용가치가 있을 것 같다.
2. 동계 이산광 유택과 귀학정 터
* 유택 위치 ; 보령시 청라면 장현리 산 51
귀학정 추정 위치 ; 보령시 청라면 장현리 986 부근
귀학송 위치 ; 보령시 청라면 장현리 70-2
보호수 느티나무 위치 ; 보령시 청라면 장현리 279-3
@ 동계공 묘갈 해설문
통훈대부행 홍산현감(通訓大夫行 鴻山縣監) 동계 이공 휘 산광 묘갈명(東溪 李公 諱 山光 墓碣銘) 옛날부터 뜻이 크고 기개(氣槪)가 있어서 남에게 자유의 구속(拘束)을 받지 않는 선비는 흔히 그 당시의 풍속을 병들게 하는 것을 근심하고, 또한 무리들과 떠나고 사람들과 끊어 벼슬이나 봉록(俸祿)을 탐내지 않고 산수(山水)에 뜻을 붙인 채 그 자취를 감추고 그 빛을 숨기는 이가 많은 법이니, 고 홍산현감(鴻山縣監) 한산 이공 휘 산광(韓山 李公 諱 山光)이 그런 분이 아니겠는가.
공은 국가의 종계(宗系) 를 바로잡고 정여립(鄭汝立)을 친 공로가 있어 모두 광국평란 원종훈(原從勳)에 기록되었고, 임진난리에는 임금의 거둥이 파천하고 세 서울(서울, 개경, 평양)이 함락되고 팔도가 어육(魚肉)되었다. 이때 공은 충의에 분발해서 임금의 행차를 따른 공이 있지만 그 백씨(伯氏) 산해(山海)가 당시 수상으로서 파천하자는 의논을 먼저 주장했다고 해서 대각(臺閣)이 모두 일어나 공격하고 배척하여 심지어 귀향까지 가게 되었기 때문에 이 까닭으로 공만이 홀로 호성(扈聖)의 훈(勳)에서 빠졌다. 이리하여 음사(蔭仕)로 참봉(參奉)이 되고 사평(司評) 등 벼슬을 거쳐서 홍산현감(鴻山縣監)이 되었다.
그러나 광해조(光海朝)에 이르러 간신들이 나라 일을 저희 맘대로 하여 윤상과 기강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근심하고 분하게 여기고 강개(慷慨)하여 소(疏)를 올려 이첨(李詹)의 머리를 베이자고 청하니, 또 여러 사람이 앉아있는 자리에서 그 얼굴에 침을 밷고꾸짖기를 ' 네가 나라를 그르치는 소인이 아니고 무엇이냐?' 하였다.
이로부터 이첨이 더욱 꺼리고 미워하니 공은 드디어 벼슬을 버리고 평량자(平凉子)를 쓰고서 보령(保寧) 시골로 돌아가 오서산(烏棲山) 밑에 귀학정(歸鶴亭)을 짓고 살면서 여러번 벼슬을 제수했어도 나가지 않고 시주(詩酒)로 스스로 즐겼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공은 그 백씨와 지취(志趣)가 같지 않았지만 백씨가 남의 비방을 많이 받는 것을 보고 이 때문에 근심하고 탄식했으니, 이것으로 역시 그 우애가 본심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또 공이 홀로 앉아서 종질 한평군(韓平君) 경전(慶全)이 일찍이 이첨을 끊지 못하고 또한 폐모의 의논을 반대하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고 탄식했다. 이를 세상에서 지목 하더니 반정(反正)이 되고 나자 사람들이 혹 억지로 일을 꾸며서 장차 큰 일이 생기게 되었다. 이에 공이 이를 위하여 계획을 내고 최완성 명길(崔完城 鳴吉)을 가보고 일이 풀리게 하도록 하게 하여 마침내 연루를 면했으니, 공의 우애가 또한 어찌 보통 심정이 따를 바이겠는가.
공은 구봉 송선생 익필(龜峰 宋先生 翼弼)을 쫒아 놀으니 송선생은 귀학정을 두고 지은 시가 있고 공을 존중히 여겨 추천했다. 이것으로 본다면 토정선생에게 학업을 배우지 않고 율곡, 우계 두 선생의 문에 출입한 것을 어찌 알랴? 세대가 멀어지고 문적(文蹟)들이 없어져서 자세히 알 수가 없으니 아까운 일이다.
그러나 충청도 시골에서 아는 것이 있는 선비들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공의 높은 풍도와 맑은 지조를 상상하고, 아무리 나무하는 아이들이나 소치는 목동이라도 귀학정이 있던 터를 가르키면서 동계, 동계 하니 공이 과연 어떻게 했기에 이런 것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인가?
공의 조상으로는 고려때 가정 문효공 곡과 목은 문정공 색의 부자가 모두 크게 나타나서 이름을 중국에 까지 들렸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으뜸 가는 집이 되었고...(이하 생략)....명(銘)에서 말한다.
뛰어난 식견과 고상한 뜻일세. 소를 올려 흉한 괴수를 배척하여 인륜을 밝히고 의리를 붙들었네. 위태로운 나라와 흐린 세상에 어찌 봉록을 영화롭게 알리. 물건 밖에 소요하면서 유연히 스스로 즐겼네. 산은 오서산이 우뚝하고 물은 금자천(金紫川)이 맑았네. 꽃다운 이름 없어지지 않으리. 아아! 어진 선비여
통정대부 성균관 대사성 시강원 원임사서(通政大夫 成均館 大司成 侍講院 原任司書) 김복한(金福漢) 지음
숭록대부 전 이조판서(崇祿大夫 前 吏曹判書) 윤용구(尹容九) 씀
통정대부 전 비서원승(通政大夫 前 秘書院丞) 김영한(金寧漢) 전자(篆字)를 씀
韓山李氏 東溪公派 宗會 (동계묘 현장 묘갈 해설비문 참조)
3. 참고자료
1) 조선환여승람(이병연 저)
귀학정 ; 청라면 위현(渭峴)의 위쪽 금자동(金紫洞) 아래에 있고 동계(東溪) 이산광(李山光)이 세웠다.
2) 내고장 보령(보령군, 1983)
청라면 위현에 귀학정이란 정자가 있다. 원래 청라는 옛날에 반다,언다,석다(양반,상소,돌)라 부르는 삼다라 이름이 높은 곳이라 신선이나 선비가 사는 곳이라 했다.
선비의 한 사람인 이산광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형은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이다. 형과 나라에서 누차 벼슬을 내렸으나 나가지 않고 이곳에 학이 많이 날아옴으로 이곳에 정자를 지어 귀학정이라 하고 선비들과 글을 나누며 선비의 절개를 지켰다 한다.(192쪽)
@ 동계 이산광의 유택
@ 동계 이산광의 비와 문인석
@ 귀학정이 있었던 명대계곡 입구
@ 이산광의 옛 집터 자리
@ 귀학정사 음식점 당시의 야외 해우소
@ 귀학정 옛 고택에 걸려 있었다는 '이군산방'의 다른사람 글씨
@ 장현저수지 아래 마을 수령이 오래된 느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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