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서해고속도로를 따라 대천IC를 들어서기 전 간사지를 지나 우측으로 낮게 솟아 있는 산이 왕대산이다.
왕대산은 해발 122.7m의 높이로 화강암으로 형성된 바위산으로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망국의 한을 눈물로 달래다가 간 산이라 하여 왕대산(王臺山) 이라 불리운다. 이곳의 중턱에는 천년고찰 왕대사라는 절이 있으며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되는 미륵불이 암각으로 흐릿하게 조각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이 절을 찾는다.
그 절 밑으로 오래전에 설치하였던 임도(林道)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데, 도로부분에 자란 소나무의 몸통둘레를 볼 때에 50여년 이상의 수령이 넘을 것으로 추측이 되어 임도 설치시기가 아마 60년대 전후일 것으로 보인다.
이 임도의 잡목을 헤쳐 나가다보면, 왕대사의 축대 밑에서 시작하여서쪽으로 능선을 돌아 산의 후편으로 올라가고 있다.
고속도로에서 바라볼 때, 왕대산 정상 후편인 이곳은 소나무 숲으로 둘러 싸여 있지만 가까이서 보면 제법 커다란 채석장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절개 된 바위벽 아래로 떨어진 집채만한 바위에는 채취 당시에 뚫어 놓았던 발파공이 여기저기에 남아 있다. 한 켠에는 발파한 바위를 다듬었던 작업장이 축대로 평평하게 만들어져 있기도 하다.
이 왕대산은 오서산이나 성주산의 줄기가 이어져 내려 왔을 터인데 바위의 질을 보면 그곳의 바위와 재질이 전혀 다르다. 왕대산 주위의 채석장으로는 해망산 정상 서쪽부분에 일제시대부터 개발을 하여 전국의 비석용 석재로 공급하였다고 하는데, 왕대산의 화강암은 더 오래전부터 화강암의 채취가 진행 되었음을 기록에 의해 증명이 된다.
신라 선종의 최대사찰인 성주사지에서 발굴된 석재의 재질이 왕대산의 화강암 재질과 동일하다고 하니, 신라시대에는 왕대산 앞 방조제가 없었기 때문에 석재 채취장까지 배가 들어설 수 있었고, 충분히 배를 이용하여 웅천천을 따라 내륙 깊숙히까지 운반을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한내천에 축조 되었던 한내 돌다리도 왕대산의 석재를 이용하여 설치하였음을 현 왕대사 입구에 남겨진 석재들로 확인 되었다고 한다.
오래 전의 석재 채취장은 왕대산 아래에서 진행이 되어 지금은 채석장의 흔적은 사라지고 전원주택 단지로 변해가고 있다.
또한 후편의 채석장은 시기적으로 보아 대천항 제방축조나 해안도로를 끼고 대천천 하류의 제방공사, 혹은 은포리 간석지 제방공사에 사용된 석재들을 생산하였던 광산으로 추측이 된다.
발파공을 뚫은 흔적으로 보아 다이너마이트 화약을 사용하였으니 아주 오래전 정으로 쪼으고 말목을 박아 균열을 발생시키는 고전적 수법이 아니니 근세의 작업장임을 알 수 있겠다.
이제는 등산길도 아니고, 나뭇꾼이 다니던 시절도 아니니 이곳을 찾을 사람도 없겠지만, 서해에서 불어오는 솔바람만이 스쳐가며 상처입은 산 허리를 치유하느라 속삭이며 달려가는 듯 무심하다.
* 위치 ; 보령시 남곡동 산 6-1
@ 왕대산 남측 경사면 채석장
@ 숲속으로 가려진 채석장
@ 바위돌에 뚫려진 발파공의 흔적
@ 큰 바위 조각으로 채석장에서 떨어진 모습
@ 일정한 방향으로 절리를 이룬 바위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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