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토정 이지함 선생은 보령출신의 큰 인물로서 이 지역의 자랑이다.
청라면 장산리 출신으로 화암서원에 조카 이산보와 함께 위패가 모셔져 숭상을 받고 있으며, 특히 개경의 서경덕 선생으로부터 수학을 하였기에 풍수나 도학에도 큰 영향을 받아 전국을 돌아다니며 자연과 인간의 연관관계에 대하여서도 끊임없는 연구를 하였다. 일설에는 토정비결이라는 책자를 엮어 서민들에게 희망의 메세지를 전파 하였다고도 한다.
토정선생이 전통적인 성리학에 기반하여 실학적인 사상을 받아들이고 민생을 구원하고자 노력한 것은 현감으로 재직하면서 상부에 올린 상소문으로도 알 수 있겠다. 하지만 세상은 그의 뜻대로 이루어 지지 않기에 세상을 주류하면서 강산의 터에 더 관심을 갖게 된지도 모르겠다.
토정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가 이 고을에 전해져 오는데, 특히 선생의 선산 묘지를 쓸 곳을 찾는 과정의 이야기와 갈머리에 살면서 갈머리 앞으로 철마가 다니는 시절이 올 것을 예측하였다는 말에는 의혹과 함께 대단함을 느끼게 한다.
성주산과 오서산 줄기 곳곳을 짚신신고 누비며 다녔을 터인데 혹여나 토정선생의 발자국에 내 발자국이 얹혀졌을 가능성도 짐작하게 된다. 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보령의 곳곳에는 토정선생의 흔적이 남아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전해오는 이야기가 사실이 아닌 구전으로 전해지는 전설이라 할지라도 그 중 어느 한 대목은 사실일거라는 믿음이 간다.
아래 관련 전설은 대보문화 제3집에 채집된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기록하였다. 토막 토막 내가 들었던 전설들이 엮어져 있기에 기록하고 차후에 알게되는 것은 보완하도록 하겠다.
* 토정선생 묘 위치 ;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 산 27-3
* 충청남도문화재 제 320호
2. 관련 전설
1) 한양조씨 묘자리 잡아준 이야기
토정선생이 성주 8모란(8군데의 모란형 명당자리)자리를 찾으려고 매일 성주산을 돌아 다녔었다.
성주산 바래기재 위 정자나무 밑에 짚신을 두고 다녔기 때문에 그때마다 바래기재에서 쉬어가곤 하였다. 하루는 정자나무 밑에서 잠이 들었는데 어느 노인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성주산 8모란은 너에게 해당되지 않으니 오서산에 가서 잡아라." 하였다. 잠에서 깬 토정선생은 성주산 줄기를 타고 청라 상중으로 해서 스므티재에서 쉬게 되었다. 그곳에는 늙은 참외장수가 참외 한 짐을 길가에 받쳐놓고 팔고 있었다. 토정선생이 참외장수와 농담을 주고 받다가 참외 먹기내기를 하였다. 바작의 참외를 전부 먹으면 참외값을 내지 않아도 되고, 만약 한 개라도 남기게 되면 참외값 전부를 물어내는 내기였다. 참외장수는 상대가 토정선생인줄은 모르고 선뜻 내기에 응하였다. 드디어 내기가 시작되었고, 토정선생은 참외를 하나 둘 먹기 시작하여 마지막 한 개까지 모두 먹어 버렸다. 마지막 참외를 다 먹자, 한 바작의 참외를 다 털리게 된 참외장수는 굶주리고 있을 자기 처자식을 생각하며 " 우리 식구 다 죽는다."라고 한탄 하였다.
이를 가엾이 여긴 토정선생은 자기가 토정이라는 것을 밝히고 "소원이 무었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참외장수는 토정선생에게 큰 절을 하고 묘자리 하나 잡아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래서 토정선생은 오서산 밑에 있는 복호혈(伏虎穴)을 잡아주게 되었는데, 이 자리는 돌너덜로 되어 있어서 돌 위에 시신을 놓고 흙을 운반해다 덮어서 묘를 썼다.
그 참외 장수가 한양조씨이고 이 복호혈에는 한양조씨의 중시조가 모셔져 있는데, 그 후 과연 한양조씨는 이 묘의 발복으로 명문거족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2) 토정선생 묘자리 잡은 이야기
토정선생이 성주산 바래기재에서 꾼 꿈을 따라, 오서산에 와 명당을 찾으니 자기에게 맞는 명당자리라곤 없었다.
오서산에서 내려와 진당산에 올라보아도 역시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진당산을 내려와 산줄기를 따라 현 주포면 마강리 구슬 근처로 내려오는데 산줄기가 끝나고 논으로 되어 있어서 더 이상 산줄기를 따라갈 수 없었다. 토정선생은 오서산에서 뻗은 살줄기에 명당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였으나 산줄기가 끝나니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돌아가지 못하고 논두렁을 왔다 갔다 하는데, 어느 농부가 논을 갈고 있었다. 그 때 마침 농부의 소는 작은 도랑을 건너지 않으려고 자꾸만 옆으로 가고 있었다. 이 때 농부가 고삐를 후려치면서 " 이 미련한 소야!. 토정보다도 더 미련한 소야!. 건너가야 할게 아니냐." 하는 것이 아닌가? 이 말을 들은 토정선생은 괘씸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걸음을 멈추고 쳐다보다가 비꼬는 말투로 농담을 시작하였다. " 어이 농부 그 거먹소로 논을 갈기 어둡지 않은가?" 하고 말하니 농부가 받아쳐서 하는 말이 "그래서 쟁기 바닥에 '볕'을 달지 않았는가"라고 하였다. 토정선생이 그 말을 받아 "어떻게 뜨거워서 논을 가는가?" 라고 하니, 농부가 "그러니까 그걸 식히려고 '성애'가 있지 않은가?"( 성애; 쟁기에 소의 힘을 연결시켜 주는 휘어진 긴 나무)라고 하였다. 그때서야 토정선생은 이 농부가 보통 농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돌아보니 농부와 소는 오간데 없었다.
여기서 깨닫고 토정선생은 산맥이 끊긴 곳을 건너가 보니 과연 훌륭한 명당이 있었다. 그래서 그곳에 자리를 잡고 후손들에게 이르기를 "이곳은 아주 좋은 명당이니 앞으로 묘 쓸 자리가 없으면 시신을 세워서 총총히 써라." 했다고 한다.
그 자리가 현재 주교면 고정리 토정선생 묘소가 있는 곳이다.
3) 토정선생 축지법 쓴 이야기
토정선생이 갈머리에서 머슴을 두고 살 때였다. 때는 가을이었고, 머슴들은 탈곡을 하면서 바지가랑이 걷어올린 사이로 들어간 곡식을 모아 떡을 하거나, 무우를 뽑아다가 먹어가면서 밤 늦도록 새끼를 꼬기도 하고 멍석, 삼태미 등을 만들기도 하였다. 당시 토정선생은 조카 이산해가 영의정으로 있었다. 토정선생은 중국애서 칙사가 와서 이것저것 트집을 잡는데 죽순나물을 가져오라고 할 것을 예측하였다. 당시 가을이라도 중국의 강남지방에는 따뜻하여 죽숮을 구할 수 있기에 토정선생은 영문도 모르는 조카(이산해는 아님)를 데리고 축지법을 써서 중국의 강남지방에 갔다. 이 때 조카는 축지법을 쓸지 모르므로 토정선생의 발자국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따라오라고 하여 데리고 갔다. 토정선생과 그의 조카는 중국 강남의 어느 강가에 다다라 이왕에 중국에 왔으니 죽순이나 한아름을 안겨 주었다. 다시 축지법을 써서 집에 돌아오니 아직 머슴들은 머슴방에서 새끼를 꼬고 있었다. 그러므로 저녁에 출발한 토정선생은 머슴들이 새끼를 꼬고 있는 동안 중국의 강남을 다녀온 것이다.
며칠 후 과연 중국의 칙사가 와서 죽순을 찾자 임금이나 이산해 이하 대신들의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 때 토정선생이 죽순을 가져다 대령하였다. 죽순나물을 본 칙사는 조선에도 이런 능력있는 신하가 있구나 하는 것을 알고, 까탈부리지 않고 얌전히 돌아갔다고 한다.
4) 토정선생이 철마(鐵馬)를 예언한 이야기
토정선생이 대천 갈마리에서 살면서 후손들에게 이르기를 " 이곳 갈머리 마을은 백마가 물을 먹는 형국인 갈마음수형(渴馬飮水型)이므로 만약 마을 앞으로 철마가 지나가면 마을의 기운이 쇠하여 지탱할 수 없으니 후손들은 멀리 떠나거라." 하였다고 한다. 왜 그런지는 토정선생 자신이 말하지 않아서 잘 모른다고 한다.
5) 토정선생 아들 죽은 이야기
토정선생은 실제로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토정선생이 사주팔자를 보니 호랑이 한테 물려 죽을 운명이었다. 그래서 밖으로 나다니지 않도록 단단히 주위를 주어 못나가게 했다. 그런데 어느날 호랑이 껍질로 만든 방석위에 앉았다가 무엇에 찔려, 그것이 덧나 죽게 되었다. 그래서 토정선생의 후손이 없다고 한다.
6) 토정비결 만든 이야기
토정비결은 원래 토정선생이 가난한 누님을 위하여 만들었다. 토정선생의 누님 하나가 출가하여 가난하게 살았는데, 먹고 살길이 막막하자 토정비결을 만들어 주고 사람들의 신수나 보아주고 먹고 살라고 만든 것이다. 그후 누님은 신수를 보아 잘 살았다고 한다. ( 대보문화 제3집, 대보문화연구소, 1994, 47~50쪽)
7) 대동기문에 실린 이야기
공의 집은 몹시 가난하여 악식(惡食)도 대지 못하게 되었다. 어느날 내당(內堂)에 앉았는데 부인이 말하길, "사람들이 모두 이인(異人)이라고 하는데, 어찌해서 내게는 시험해보이지 않으시오?"하자 공이 말하길, "내가 장차 나비를 만들 터이니 그대는 보겠는가?" 했다. 부인이 말하길 "지금은 깊은 겨울인데 어찌 나비가 있겠소? 영감의 말은 망령된 겁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공은 "보기나 하시오." 하고 즉시 바느질 그릇을 가져다가 색색의 비단 조각을 골라서 손에 쥐고 나직히 주문을 외웠다. 그리고 비단 조각을 공중에 던지니 나비들이 훨훨 날아 밤하늘에 가득했다. 오색 찬란한 나비들이 각각 자투리의 본빛을 따라 춤을 추니 눔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이것을 보고 부인이 말하길 "지금 양식이 떨어져 장차 조석을 끓이지 못하게 되었는데, 어찌해서 신술(神術)을 써서 구원하지 않으시오."라고 했다. 공이 웃으며 말하길, "무엇이 어렵겠소?"하더니 즉시 계집종을 불러 유기그릇을 하나 주면서 말했다. " 이 그릇을 가지고 경영교 앞에 가면 늙은 할멈이 백전을 주고 사자고 할 것인즉, 너는 이것을 팔아가지고 오너라." 공의 분부대로 계집종이 경영교 앞에 가보니 과연 유기그릇을 원하는 자가 있는데, 공이 애기한 대로였다.
계집종이 돈을 받아가지고 오자 공이 다시 말하였다. "이 돈을 가지고 서소문 밖 시장에 가면 도롱이 입고 삿갓을 쓴 사람이 수저를 급히 팔려고 할 것이니 그것을 사오너라."했다. 계집종이 또 가보니 과연 말한 대로여서 수저를 사가지고 와서 바치니 이는 은수저였다. 공은 또 말하길, " 이 수저를 가지고 경기감영 앞에 가면 하인 하나가 수저를 잃어버리고 같은 물건을 구하고 있을게다. 네가 이것을 보이면 열다섯 냥을 줄 것이니 팔아가지고 오너라."라고 했다. 계집종이 가보니 이번에도 역시 공이 말한대로였다. 계집종이 열다섯 냥을 받아와서 공에게 바치자, 공은 다시 한 냥을 계집종에게 주면서 말했다. "그릇을 산 늙은 할미가 밥그릇을 잃어버리고 대신 유기 그릇을 샀는데, 이제 잃어버린 밥그릇을 찾아 무르고자 할 것이니 네가 가서 물러주고 찾아 오도록 해라." 계집종이 다시 그 자리에 가보니 과연 그대로였다. 이에 돈을 주고 유기그릇을 찾아와 바치자 공은 남은 돈과 그릇을 부인에게 주면서 조석 끼니를 장만하는데 쓰라고 했다.
부인이 다시 더 얻어주기를 청하자 공이 말했다. "재물이 많으면 반드시 재앙이 따르는 법이니 이만하면 족하오."(조선의 슈퍼스타 토정 이지함, 이 태복, 동녘, 2011, 222~223쪽) - 이지함 선생의 실물경제(실사구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이야기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유기 그릇이 돌고돌아 원자재는 자신의 손으로 다시 돌아오고, 순수익이 열네 냥을 낼 수 있었다면 사기꾼(?)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요즘 시대처럼 인터넷이 발달하여 당근마켓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이렇게 미래를 예측할 수 있었다는데 경외감이 솟는다. 아마 후대 사람들이 선생의 실학사상을 존경하는데에서 회자된 이야깃거리였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2022.03.07)
3. 참고 자료
1) 묘지의 구성이 타 문중선산에 비해 비좁고 어수선하게 보이는 것은 위에 제시한 두번째 이야기처럼 "이곳은 아주 좋은 명당이니 앞으로 묘 쓸 자리가 없으면 시신을 세워서 총총히 써라."라는 토정선생의 유언에 의해 후손들이 명당이라 일켵는 지점에 촘촘하게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대와 중세의 유럽 공동묘지처럼 현실에 직시한 토정의 실학적 사상이 구현된 실행이라 할 수 있겠다. 선생의 묘택에서 앞을 바라다보면 앞 바다에 떠 있던 송도섬 세봉우리가 묘택을 향해 절을 하는 모습이라 명당이라고 전하는데, 세월이 수상하여 송도섬은 육지로 연결이 되었지만 선생이 살던 시대에 이곳에 묘택을 정하고 탄성을 지른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을 것 같다.(2021.11.06)
2) 묏자리는 고향에서 너무 멀어도 곤란하고 땅이 습하거나 바람이 거칠면 송구스럽다. 결성현의 은하 일대에도 기운이 있으나 너무 돌아가야 했고, 오서산은 내포일대를 조망하기에 좋지만 기운이 약했다. 성주 안쪽은 거리가 먼 느낌이 있었다. 몇 차례 발품을 팔다가 지함은 청라의 고향집에서 나와 30리 거리에 있는 주포의 갯가에 붙은 고만산 자락에서 좋은 혈을 찾았다. 더욱이 고만산은 어머니가 유산으로 받은 땅이니 얼마나 좋은가(지함의 어머니가 광산김씨임). 형제들이 지함이 찾은 묏자리에 가보았다. 와우형(臥牛形)이었다. 형 지번이 혈과 지세를 자세히 살피고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부모님을 모시기에는 더 할 수 없이 좋은 자리인 것은 분명하다. 하나 우리 삼형제가 내년에 볼 자식들의 운이 문제다. 내 자식들의 운이 제일 좋고, 둘째는 그 다음이고, 셋째가 제일 나쁜데 어떻게 이 자리를 잡겠나?" 그때 지함이 형들에게 말했다. " 혹 불리한 부분이 있다면 마땅히 막내인 제가 재앙을 당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거꾸로 형님들에게 좋은 일이 있다면 저에게도 기쁜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주저하지 말고 여기로 하십시다." (조선의 슈퍼스타 토정 이지함, 이 태복, 동녘, 2011, 37~38쪽,2022.03.07)
@ 고정리 이지함 선생 묘역
@ 토정선생의 유택
@ 묘역의 배치도(2021.11.06 촬영)
@ 이지함 가계도(조선의 슈퍼스타 토정 이지함,이태복,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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