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190

제 109편 ; 동계 이산광과 귀학정 터

1. 들어가며 오서산 줄기가 남쪽으로 치맛자락 펼치듯 품을 내주어 황룡천을 따라 넓은 벌판을 형성하여 물산의 생산이 충분하여 옛부터 주민이 살기 좋은 동네를 만들어 주었다. 장현리로 들어서면 은행마을의 평산신씨의 신경섭 전통가옥이 있으며, 그 위쪽으로 안동인 김이철이 지은 가소정이라는 정자가 있으니 예부터 많은 토족 양반들이 거주하여 왔음을 알 수 있겠다. 특히, 한산이씨는 수몰된 서원마을 부근의 광산인 김극성과 연계되어 이치를 위시하여 이지번, 이산해, 이산보, 이지함 등의 유명인을 배출한 세족으로 이 땅에 터를 확고하게 다지게 되었다. 토정선생의 선산이 고정리 보령화력 부근에 있는데, 유독 이지번의 아들인 이산해와 이산보의 유택이 예산과 명대계곡에 위치하여 계파를 달리하여 소종중으로 이어가고 있음에 ..

제108편 ; 화성 채제공 상의사(尙義祀)

1. 들어가며 보령에서 청양땅은 지척에 있는 이웃 동네이다. 보령~공주간 36번 국도를 따라 청라와 화성사이 스므티재를 경계로 지역이 나뉘어져 있지만, 예로부터 오일장이나 집안간 혼사로 지역간 교류가 흔하게 이루어졌다. 혹자는 성주산의 줄기가 성태산, 백월산을 지나서 스므티라는 고갯길을 내주고 오서산으로 맥을 이어가면서 분수령을 만들어 청양과 보령의 물줄기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보령의 물줄기는 대천천을 큰줄기로 바로 서해바다에 들어서는데 반해 청양쪽은 서북방면 무한천으로 흘러 예당저수지를 거치고 삽교천으로, 또 삽교호를 통해 서해바다로 들어가는 긴 여정을 거치기에, 이러한 자연 환경요인에 의해 보령과 청양의 충청도 특유의 느림 정도가 다르다고도 한다. 그러나, 오서산을 중심축으로 할 때 청라..

제107편 ; 명천 이문구선생의 집필 터

1. 들어가며 '60년대 청천저수지의 축조로 인해 화암서원이 있던 마을이 수몰 되면서 장산리는 두개의 마을로 확연히 분리되는 현상이 있었나 보다. 내 기억으로는 아랫장골에서 윗장골까지의 아이들이 모두 청라초등학교에 입학하여 같이 다닌 기억은 있는데, 지금의 보령병원에서 부터 주포로 넘어가는 질재를 끼고 형성된 화암서원 마을의 장산리 아이들이 기억에 없다. 현재의 화암서원에서 조금 옥계쪽으로 가면 시궁골이 시작되는데 이곳부터가 옥계리에 속하여 아마 이곳 장산리 아이들은 저수지의 수몰로 장현리, 신산리, 옥계리 아이들과 함께 옥계초등학교에 다닌 것으로 추측이 된다. 오서산 골짜기 물을 받아 황룡천이 흘러 오면서 석우천, 길현천, 옥계천과 합류하여 화암서원쪽으로 내려오면 건너편 장골마을의 냇물과 질재 고개밑 ..

제 106편 ; 아계 이산해의 유택

1. 들어가며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 1539~1609)는 보령과 관련이 깊다. 그의 할아버지 이치(李稚)가 김성우장군의 3세손 김맹권의 딸과 혼인하여 보령의 입향조가 되는데, 이치의 둘째아들인 지번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치의 넷째 아들이 토정 이지함선생이니 이지함은 이산해의 작은아버지가 된다. 광성부원군 김극성은 김맹권의 아들로 이치와는 처남, 매부지간이 되므로 광산김씨의 세거지인 청라동 장산리 담안마을, 서원마을(청천저수지 설치로 물에 잠김)에 한산이씨가 자리를 잡게 되는 계기가 된다. 조선시대 중기까지는 재산의 분재(상속)에 있어서 남녀 차별이 없는 균등한 분배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많은 씨족들이 외가쪽 마을에 정착할 수 있었다. 이산해는 한양에서 태어났는데 아마도 아버지의 관직에 의해 그곳에서 ..

제 105편 ; 광천 쪽다리의 추억

1. 들어가며 보령땅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낸 5~60대 이상의 장년층이라면 아마 '광천 쪽다리'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조그만 말썽이라도 피운 날이면 부모님들은 으레 ' 너는 광천 쪽다리 밑에서 주워 왔으니까, 말썽을 피울려면 네 친엄마 찾아가라. 쪽다리 밑에 가면 엿 파는 네 엄마가 있을 터이니 거기서 맛있는 엿도 먹고, 네 마음대로 놀아도 되니 거기로 가!'. 동네 모든 아이들이 이런 말을 들었으니 어쩌면 그 엿장수 아주머니는 모든 보령땅 아이들의 친엄마가 된다는 이야기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아이를 낳았을까 하는 농담과 보령의 모든 아이들은 친형제라는 농담 마저 던지기도 하였다. 50년도 훌쩍 지나간 세월 속에 아마 보령에서 광천시장으로 가는 국도길에 콘크리트 다리가 있기에 그 다리를, 아이의..

제104편 ; 성주 도선국사 시비(詩碑)

1. 들어가며 보령에는 다른지역 보다도 유별나게 곳곳에 詩碑가 많다. 보령에 문인(詩人)들이 많아서 그런 것도 아니고, 문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서도 아니고, 아쉽게도 예부터 질 좋은 석재가 생산되어 비석이나 건축자재로 많이 쓰였기에 석재산업이 발달한 이유가 클 것이다. 그 많은 시비 중에 특별히 눈에 띠는 성주산 휴양림 입구에 서 있는 도선국사의 칠언고시(七言古詩) 시비가 오가는 산행인의 마음을 촉촉하게 적시기에 그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는 신라말엽의 승려로 신라가 멸하고 고려가 흥할 것이라는 예언으로 잘 알려져 있어, 우리나라 풍수지리학의 역사가 도선으로부터 시작 되었다고 평하고 있다. '성주사'라는 시를 읽어보면 작자가 이곳을 다녀가지 않고는 시상이 이렇게 떠 오르..

제103편 ; 명천동 사명대사 기적비

1. 들어가며 옛 대천고등학교 자리에 교육청에서 운영하는 보령도서관이 있다. 고향에 내려와 보령시에서 운영하는 중앙도서관과 이곳에서 필요한 도서를 대여하여 읽고 있는데, 도서관 한켠에 '유정 사명대사 기적비'가 세워져 있어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였다. 기적비(紀跡碑)라 함은 '사적을 적은 비'로 사적비(事跡碑)와 비슷한 말로 '역사적, 사실적인 발자취를 기념하기 위한 비'라 할 수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 서산대사와 함께 승병으로 지대한 공을 세운 사명대사가 우리 고향과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 살펴보게 되었다. 사명당(四溟堂)은 경남 밀양 출신으로 속명은 응규(應奎)이며 성씨는 풍천임씨(豊川任氏)이다. 1544년(중종39)에 태어나서 1610년 입적을 하였는데, 1559년 김천의 직지사로 출가를 하고 1581년..

제102편 ; 웅천읍 소황리 소황사구

1. 들어가며 바닷가에 존재하는 사구(砂丘)는 바닷속에 있던 모래가 밀물의 힘에 의해 해안가로 밀려오고, 다시 바람에 의해 육지쪽으로 날려오면서 언덕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부사방조제 위에서 밀려오는 바닷물을 바라보노라면 얕은 바닷물 속으로 희미하게나마 모래언덕이 바닷가쪽으로 옮겨지는 현상을 볼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는 천연기념물 제431호로 지정이 되어 보존되고 있는 태안의 신두리 해안사구가 유명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자연 그대로의 경관을 가지고 있는 소황리 사구 또한,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여 원형으로 잘 보존되어 있어 신두리 해안 못지않은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소황리 사구가 지금처럼 잘 보전될 수 있었던 데에는 소황리 일대가 오랫동안 군사보호지역(공군 사격장)으로 개발이 제한될 수 밖에 없었던..

제101편 ; 청라농공단지조성 터 유적발굴 조사

1. 들어가며 올해 초 4월부터 청라면 내현리에 들어설 농공단지 조성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사전 유적발굴 조사작업이 전문기관에 의해 진행되고 있었다. 수시로 황룡리의 농막을 오가면서 관심을 가지고 눈여겨 보다가 며칠 전, 작업을 진행하는 모습을 보고 그곳을 방문하였다. 관계자의 설명에 의하면 이곳에서 청동기 시대로 추정이 되는 움집의 흔적(일명 돼지코라 불리는 움집의 기둥을 박았던 흔적과 화덕을 설치하였던)과 가마터, 각 시기마다의 분묘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올해 연말에 학술조사의 결과를 발표할 것이라니 자세한 것은 자료집을 받은 후에나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 같다. 주변의 관창공단 조성시에도 많은 구석기와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발굴 되었고, 최근 명천동 아파트 단지 조성공사시에도 약 5만년전의 구석..

제100편 ; 다산의 발자취로 본 보령의 '금정도'

1.들어가며 조선시대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서 전국 각 지방을 연결하는 도로를 구축하였다. 충청도는 서남부 지역을 연결하는 도로를 '이인도'라 칭하고, 부여-홍산-한산,서천 그리고 비인-남포, 공주-정산을 연결하여 9개 역을 관장하였으며, 서북부 지역에 '금정도'라고 칭하는 도로망을 청양-결성-홍주-보령-해미-서산-태안, 그리고 청양-대흥으로 8개 역을 관장하였다. 각 역에서는 파발마를 관리하여 공무로 이동하는 관원들에게 말을 빌려주어 빠른 시간에 전국을 연결하는 정보망을 구축하였다. 여기서 현재의 보령지역에는 이인도의 남포 남전역이, 금정도의 보령 청연역이 소역(小驛)에 해당되어 연결망의 한 축이 되면서 각 역마다 소로(小路)로 연결 되어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다산 정약용은 1795년 7월 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