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120편 ; 미산 박승건, 박세주 정려각

푸른나귀 2021. 3. 24. 19:24

1. 들어가며

 

    도화담 삼거리에서 외산면 쪽으로 조금가면 왼쪽으로 산 아래 정려각이 있다.

  대부분의 정려각이 한 칸 정도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데 이곳은 정면 두 칸에 측면 한 칸으로 제법 잘 보존되고 있었다.

  조선시대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유교 국가였기에, 특히나 충효에 대하여는 백성들에게 인간의 근본임을 강조 하였다.

  이에 따라 전국에는 지역 유림들의 상소에 의해 효자 ,열녀에 대한 정려각이 나라에서 하사되어 마을 입구에 세워지는 일들이 많아졌다. 

 

 박세주는 아버지가 용인군수로 있을 때 지병으로 고생을 하게 되자, 열세살의 어린 나이로 아버지의 임지로 가 병수발을 하였다고 한다. 어머니와 마주 앉은 아버지가 죽순을 먹고 싶다고 하자 추운 겨울날 밖으로 나와 대나무밭을 돌아다니며 죽순을 찾아 보았지만 구할 수 없기에 눈밭에 앉아 천신께 불효자식이 효도할 수 있도록 죽순 있는 곳을 가르켜 달라고 기도 하였는데 신기하게도 자기가 기도 드린 눈밭에서 뾰죽하게 죽순이 올라오게 되어, 그것으로 음식을 해드리니 병환이 나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내고장 보령, 1983,123쪽)

 

 운전을 하면서 동네 앞 도로옆에 서 있는 효자각이나 열녀문을 보아도 관심을 갖고 잠시 차를 멈추고 둘러보는 사람도 흔치 않다. 시대가 바뀌어도 크게 바뀌어 열녀니 효자니 하는 인간 근본의 사상이 변하였기 때문일 것이기도 하고, 빠르게 변하여 가는 시대를 쫒아가다 보니 겨를이 없는 이유일 것이기도 하다.

 가문의 번영을 위해 본성을 감추고 도의를 위해 희생하였을 이 땅의 효부와 효자들의 마음이 읽혀진다.   

 

2. 박승건, 박세주 정려각

 

    ※ 위치 ; 보령시 미산면 도화담리 36

 

   박승건(1609~1667)의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호는 성은 (成隱)이며 명종 때 대제학을 지낸 낙촌 박충원(駱村 朴忠元)의 증손이다. 효종 때 과거에 급제하고 용인현감, 사헌부장령, 상주목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우암 송시열 선생과는 도의지교(道義之交)하여 교분이 두터웠다.

 평소에 형제간의 우애가 깊었고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여 1706년(숙종32)에 조정에서 효자 정려가 내려졌다.

 박세주(1641~1725)는 박승건의 셋째 아들로 호는 정수재(靜水齋)인데, 송시열에게 글을 배웠다. 

 일생을 처사(處士)로 살면서 아버지 병환에 겨울 죽순을 구하고 허벅지 살을 베고, 어머니 병환에 세 손가락을 베는 등 효성이 지극 하였으므로 1765년(영조41)에 조정에서 정려가 내려졌다.

 1831년(순조31)에 두 분의 정려를 현 위치의 건너편인 보령시 도화담리에 세웠으나, 1983년 현 위치에 옮겨 세웠다.

 박세주가 이곳 도화담에 정착한 이후로 후손들이 밀양박씨 성은공파를 이루며 대대로 살고 있다.(현장 안내판 참조)

 

 미산면 도화담리 마을 입구 도로변에 위치한다. 남향의 정면 2칸, 측면 1칸의 건물로 팔작지붕 양식이다. 내부에는 2기의 비석과 중수기를 걸어 놓았다. 또 각 칸에는 현액이 걸려 있는데 좌측에는 효자처사박세주지문숭정후재기유육월일명정(孝子處士朴世冑之門崇禎後再己酉六月日命旌)이라고 각서 되어 있고, 우측에는 효자통훈대부행사헌부장령박승건지문숭정갑신후육십삼년구월이십이일명정(孝子通訓大夫行司憲府掌令朴承建之門崇禎甲申後六十三年九月二十二日命旌)이라고 각서 되어 있다. 

 원래 개화리에 있었으나 1983년 도로 개설로 인하여 현 위치로 신축 이전 하였다. 박승건은 부친 병환에 손가락을 잘랐고, 박세주도 부친 승건의 병환에 겨울 죽순을 구하고 허벅지 살을 베어 부친에게 드렸다. 부친 사후에 모친 모시기를 극진히 하였다. 박승건,박세주의 본관은 밀양이다.(현장 안내판 참조)

 

 

   @ 정려각 정면 전경

   @ 정려각 내부의 비석과 정려 현액

    @ 정려각 안내문

    @ 정려각 표지판

    @ 정려각 안내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