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121편 ; 미산 아미산 중대암

푸른나귀 2021. 3. 24. 19:30

 

1. 들어가며

 

 용수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용암부락(龍巖部落)과 수현부락(水絃部落)이 통합되어 불리게 되었다.

 용암(龍巖)이라는 지명은 양각산 줄기에 서 있는 용바위에서 유래 되었는데, 옛날에 동굴에서 나온 용이 승천을 하였다는 전설을 품고 있다. 웅천천을 중심으로 건너편 마을의 지명이 수현(水絃)인데 아미산 줄기를 따라 위치한 부락으로 산세에 의해 물이 풍부하여 부락명을 수현(물줄)이라 하였다고 하는데 수현(水絃)이라는 이름은 염뜸마을에 남아 있는 파주염씨 사당의 이름이 수현사(水鉉祠)로 남아 있다.

 용암마을이나 수현마을이 보령댐의 수몰로 인하여 뿔뿔이 흩어져 인물도 사라지고 지명도 사라질까 걱정이 된다.

 

 아미산의 장군봉 아래로 골짜기가 깊은데 이곳에 상대, 중대, 하대암이 자리하고 있다.

 '내고장 보령(1983)'에 의하면 중대사는 백제말 혜*화상(慧*和尙)이 창건한 것을 조선 때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무학대사( 舞鶴大師)가 중건 하였으며 불교에 입선이 배출되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근시에도 이 절에서 만학도들의 출입이 잦으며 이 절에서 공부하여 출세한 분이 많다고 기록 되었으며, 상대암은 중대사 위편에 자리한 암자로서 본래는 임가마공(任可馬公)의 묘막이었는데 약 30여년 전에 스님이 암자로 개축하여 현재 명성이 있는 암자가 되었으며 상대라는 명칭은 중대의 위편이라 상대로 불리운 것 같다. 임학준(任學準)이 고종황제의 영정을 모시고 송엽만 먹다 자결한 곳이기도 하다.

 중대사의 입구에 소재한 물탕(약수터)으로써 약간의 동굴 형식이 되어 있으며, 이 동굴에는 맑은 물이 사철 마르지 않고 연중 물을 먹을 수 있고, 목욕객이 끊이지 않으며 부정한 사람은 출입을 못한다는 전설이 있다고 기록 하였다. 

 

   

 

 

2. 중대암과 상대암

 

      ※ 위치 ; 보령시 미산면 용수리 81-1

 

    중대암은 신라 49대 헌강왕 4년(879년) 무술년에 도선국사께서 개산창건 하시고 산 이름을 아미산이라고 지으셨으며 중대암을 비롯 위쪽에 상대암(보현선원), 아래에 하대암 등을 세우셨고, 그 후 고려 숙종 2년(1097년)에 중수하여 산내의 남쪽에 지장암과 서쪽에 미타암이 있어 사찰 규모가 수도선원으로 발전하였던 중,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침입으로 사찰이 모두 전소되고 인근 피난민들이 중대암을 중심으로 뒤쪽 산골짝(속칭 적시골)과 남쪽 절골 등에 피난 왔으나 사찰 전소 등으로 모두 피해를 봐 이름이 적시골이라고 전한다.

  중창은 이조 중종17년(1522년) 4월에 김기,최삼오, 두분의 선사스님이 중건 하였다. 순조15년(1815년) 홍종운(당시 이조판서)이 중대암 중건 사유재산이던 산을 중대암 소유로 기증하고 관음전을 3월에 해체, 축소, 복원 하였다.

 1964년 홍도관 스님께서 중대암 주지로 임명받아 잘못된 사찰 재정을 바로잡아 1967년 중대암으로 등기 환원하고, 중창불사의 기반을 조성하여 1964~1979년에 개수하고 1988년에 전통보존 사찰 충남 29호로 지정 되었다.(이하 생략)(현장 안내판 참조) 

 

 

    @ 중대암 전경

   @ 현장 안내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