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123편 ; 미산 평라리 선사 유적

푸른나귀 2021. 7. 27. 11:26

 1. 들어가며

 

     보령댐이 수몰되기 이전에 그 그 지역의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가 충북대, 이화대, 공주대를 중심으로 협력 발굴작업이 이루어졌었다.  주요 유적지로는 평라리를 중심으로 한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 유적과, 용수리를 중심으로 한 천방사지 유적과  도요지 발굴이 중심이 되었다.  평라리 선사유적은 기원전 2500년경부터 멀리는 기원전 6세기경까지 올려볼 수 있는 흔적으로 이 지역에 고조선시대에도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용수리의 천방사 절터 유적은 양각산 아래 천개의 방을 가진 절이라는 이름에서 따온 것에 알수 있을 듯이 백제 후기에 세워진 성주사와 함께 절의 세력이 상당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 곳에서 나온 기와편과 도요지에 의해 이 절이 고려시대(영흥사)를 거쳐 조선시대에까지 번영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평라리 유적은 처음엔 단순한 고인돌로 생각하였으나, 발굴조사 결과로 14기의 돌널무덤이 확인 되었고  이전까지와는 다른 3층구조의 중층으로 이루어진 돌널로 이루어져 학계에서는 '평라리식 돌무덤'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유리구슬 한점이 돌널 주변에서 발굴 되었는데, 돌널 안에서 나온 것이 아니어서 주목을 받지 못하고 후대에 뒤섞여 들어간 것으로 생각되어 수장고에 잠들어 있었다고 한다.

  부여의 송국리 유적에서 239점의 대롱옥과 파란 유리구슬이 주목을 받으면서 이곳에서 나온 유리구슬도 다시금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이 유리구슬들로 인해 기원전 5세기경의 한반도 청동기 시대에 과연 유리구슬을 만들 수 있는 제작기술이 있었는지 검토 연구하게 되었다고 한다.  

  유리의 기원이 대략 기원전 4~5세기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기원전 15세기 경에도 메소포타미아에서 유리그릇을 만들었다는 학설도 또한 존재한다. 기원전 1세기에는 대롱불기 기법으로 유리그릇의 대량생산도 이루어졌다고 하니 이 유리의 제작과정이 비단길이나 해로를 통해 신라에 들어와 신라고분에서 출토된 유리들에 의해 그당시 서역과의 교류를 짐작하게 된다.

 특이한 점은 신라의 경주에서 그 많은 유리제품이 고분군에 발견되는 것과는 달리 백제와 고구려에서는 유리제품이 나오질 않아 백제와 고구려의 도기제품과는 다르게 신라나 가야에서는 유리의 선호도가 큰 것으로 아마 취향이 서로 달랐다고 볼 수 있겠다. 

 박물관 연구진에 의하면 부여쪽의 유리구슬은 중국 전국시대 월나라에서 칼륨함량이 높은 포타쉬 유라를 제작 하였는데, 이 중국 동남부지역의 월나라가 중국 한나라의 침공으로 멸망할 즈음(기원111년)에 중국 남부와 한반도 간의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증명하기도 한다. 

 마치 우리 어렸을 때 가지고 놀던 구슬이 청동기 시대의 돌무덤에서 발견이 되고, 이 구슬 한 점으로 청동기 시대에도 동남아 지역과 한반도의 교류가 있었음을 알게하니 누천년이 흐른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경외감을 갖게 한다.

  보령호는 청동기 시대를 살아가던 청동기인들의 숨결을 물속에 간직하고 넘실대고 있다.(참조; 보령 평라리 유적과 유리구슬, 국립청주박물관, 이양수 강의자료참조)

 

  

  @ 아미산 정상에서 바라 본 보령댐에 수몰된 용수리와 평라리

  @ 국립 청주박물관 이양수교수의 '평라리 유적과 유리구슬' 강좌

   @ 평라리 유적에서 발굴된 유리 구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