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118편 ; 주교 봉대산 봉수대

푸른나귀 2021. 2. 15. 19:40

1. 들어가며

 

   조선시대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서 전국 각 지방을 연결하는 도로를 구축하였다.

  충청도는 서남부 지역을 연결하는 도로를  '이인도'라 칭하고, 부여-홍산-한산,서천 그리고 비인-남포, 공주-정산을 연결하여 9개 역을 관장하였으며, 서북부 지역에 '금정도'라고 칭하는 도로망을 청양-결성-홍주-보령-해미-서산-태안, 그리고 청양-대흥으로 8개 역을 관장하였다. 각 역에서는 파발마를 관리하여 공무로 이동하는 관원들에게 말을 빌려주어 빠른 시간에 전국을 연결하는 교통망을 구축하였다. 여기서 현재의 보령지역에는 이인도의 남포 남전역이, 금정도의 보령 청연역이 소역(小驛)에 해당되어 연결망의 한 축이 되면서 각 역마다 소로(小路)로 연결 되어 있었다.(제100편 ; 다산의 발자취로 본 '금정도' 참조)

 

   이 도로와 함께 중앙집권 체제의 강화를 위한 방편으로 '봉수로'라는 통신 수단을 강구하게 된 것이다.

  보령지역에는 남해안으로부터 한양에 이르는 봉수로가 서해안 해안가를 경유하여 연결이 되어 있고,  바다 한가운데 외연도에서 봉수가 올려지면 보령의 충청수영성을 경유하여 왜적들의 침입을 도성으로 연락하는 역활을 하였으니, 조선시대에 중앙으로 빠른 정보를 전달하는 통신시설을 충분히 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눈에 의해 사실을 연기와 불빛으로 봉수대 간에 전달하다보니 오류가 발생하기도 하여 부정확한 정보의 전달이 있게 됨에 따라 효율성이 떨어지기도 하였다.

 

  보령에는 조선시대 봉수대가 설치되었던 산봉우리에는 지금도 산이름에 남아 있다.

 옥마산 줄기의 봉화산, 주교면의 봉대산,  천북면의 봉화산, 외연도의 봉화산 등의 이름으로 흔적이 남아 있으며, 전국의 곳곳에 봉대,봉수,봉화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기도 하다.

 대부분의 봉수대 유적은 홰손이 되어 있지만, 원형에 맞게 복원을 하여 후세에게 전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본다.

 봉수대는 조선시대에 사용하였던 휴대폰이나 마찬가지였다고 본다.

 

 

2. 조침산(助侵山) 봉수대지

 

       * 위치 ; 보령시 주교면 은포리 산 45-1

 

   조침산 봉수대는 보령시 주교면 송학리 봉대산 (옛 이름 ; 조침산) 235m 정상에 위치함. 조침산 봉수대는 조선 세종 때에 보령현에 설치한 봉수대였는데 남해안 순천 돌산도 방답진에서 시작되어 한성 목멱산 경봉수에 이르는 제5로 중 하나의 간봉이었음. 또한 세곡물을 보관 이동하였던 해창이 가까이 있고 서해의 시야가 탁 트여 서해에 나타나거나 침투하는 외적을 관측 그 사실을 봉수로 연락하는 연변 봉수대의 구실을 했음. 남으로는 10여km 떨어진 옥마봉 봉수대에서 응하였고, 북으로는 거의 같은 거리의 당시 홍주 흥양(현재 보령시 천북면 사호리 봉화산) 봉수대에 응함. 20여m 둘레의 연대를 설치한 흔적이 남아있고 최근까지 연조가 있던 터가 보임. (현장 안내판 참조)

 

   @ 봉수대의 측면

   @ 봉수대의 후면

   @ 봉수대의 전면

  @ 봉수대의 현장 안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