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127편 ; 청라 신산리 고인돌

푸른나귀 2021. 12. 26. 15:30

1. 들어가며

 

  예전에 청라에 남아 있는 고인돌을 답사하면서 (제110편 ; 청고을에 남아 있는 고인돌 참조) 신산리 고인돌은 가까운 곳에 있어서 답사를 차일피일 미루게 되어 한 해가 지나가게 되었다. 

 그 글에서 대보문화 6집을 인용하여 ≪ 신산리 고인돌 ; 청라면 신산리 143-3번지의 서북쪽 끝 도로변에 1기의 고인돌이 있다. 이곳은 낮은 구릉의 말단부로 구릉과 평지가 접하는 곳이다. 해발고도는 110m정도이지만 주변과의 차이는 3~4m밖에 되지 않는 언덕이다.≫라고 간략하게 설명하였었다.

 대부분의 고인돌이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들판에 널브러저 잡목속에 덩그러니 있으려니 생각하며 인터넷 지도를 로드뷰로 검색하여 보니 이곳 또한 잡목과 풀섶으로 뒤덮여 있음을 확인하고 늦가을 낙엽이 지면 찾으리라 마음을 갖게 되었었다.  겨울 한파가 갑자기 몰려와 집안에 움츠리고 있다가 문득 신산리 고인돌이 생각나기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곳을 향하였다. 

 

  신산리 고인돌은 610번 지방도를 따라 옥계쪽에서 화성의 화강리로 넘어가는 완만한 고갯길의 우측으로, 신산 마을회관에서 음현리로 들어가는 도로 옆으로 위치하고 있다.

 높이는 1m 정도, 길이는 2m 정도, 폭은 1.5m 정도로 약간 동서로 길고 둥그스런 형태를 가진 덮개돌로 덮여있다. 하부에는 굄돌로 받혀 있으며 무덤방 부근은 덮개돌이 평편하게 다듬어져 있어 굄돌 옆으로 무덤방의 형태가 나타난다.

 암석의 재질은 부근 오서산에서 볼 수 있는 퇴적암 중에 편마암 종류인 듯 바위에 켜켜히 더깨가 진 느낌이다. 농로와 농로 사이 낮은 둔덕에 잡목으로 뒤엉키고 덩굴식물에 휘감기어 평상시에는 그저 평범한 돌덩어리로 치부될 것 같아 안쓰럽다. 약간의 손을 보아 다듬고 조그만 안내판이라도 하나 설치한다면 지나가던 행인이라도 눈길 한번 더 주고 2천여 년이라는 세월 보다도 더 오랜 예전에도 이곳에 사람들이 살았음을 기억할텐데 하는 마음이 앞선다.

 대천천의 상류인 황룡천의 상류지역인 이곳에 5톤 정도의 고인돌을 설치하기 위해서는 부족이상의 원주민이 살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고조선이 멸망한 B.C 108년 경에 충청지역에는 한나라와 교역을 하며 세력을 키워온, 즉 백제가 남하하기 이전에도 진국이라는 부족 연맹들이 살고 있었으니 그들의 흔적일지도 모르는 데 후세인들이 너무 무관심해 하는 것이 아닐런지?

 고인돌 덮개 위로 뿌리를 내리며 몸을 키워가는 잡목이 세월의 수상함을 알려주는 것 같다.

 

 

2. 고인돌의 위치

 

     @ 보령시 청라면 신산리 143-3 

 

     @ 편마암으로 된 덮개돌은 300*135*120cm, 둘레는 8.0m이다. 바닥은 극히 평편하고 둘레는 다듬은 흔적이 있다. 덮개돌의 북쪽과 남쪽에는 납작한 굄돌이 있다. 북쪽의 것은 150*90*30(h)cm이며 수직의 층리를 가진 편마암으로 무덤방쪽으로 매끈한 면을 두었다. 남쪽의 것은 185*60*30(h)cm로 편마암이며 무덤방 쪽으로 또한 매끈한 면을 두었다. 무덤방의 폭은 1.0m이다. 

 한때 고인돌의 문화적 중요한 가치를 인지하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함부로 무덤방이 파헤쳐저, 직경 15cm 정도의 점판암과 편마암이 노출되어 있기도 하다. 최근 이 고인돌의 문화적 가치를 인지하기 시작하면서 달라졌다.(보령 신산리, 신재완, 보령문화원, 2022, 27쪽)

 

  @ 고인돌의 북서쪽 면

  @ 고인돌의 북쪽 면

  @ 고인돌의 남쪽 면

   @ 고인돌의 굄돌 부분  

  @신산리 고인돌의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