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오서산 중턱에 위치한 '도독의 성'이 백제부흥운동시 조성되었을 가능성을 인식하고는 주변의 백제부흥 관련 자료를 찾아보았다.
서천의 금강입구에는 기벌포 1,2차전으로 백촌강 전투를 설명하고 있고, 예산 봉수산의 임존성은 백제부흥운동의 주력 산성으로 기록되어 있어 금강하류와 임존성에서의 항거가 당연하다고 인식해 왔는데, 좀더 살펴보니 위치비정에 이론(異論)이 많음을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일본의 학자와 그를 계승한 학자들 사이에 부흥운동시 항전의 장소로 주류성의 한산설(건지산성)과 백촌강의 금강하류설이 우세하였으며, 주류성을 부안 변산반도에 있는 위금암산성이며 백촌강은 동진강이라는 설, 그리고 김정호의 대동여지에 의한 홍주읍성이 주류성이라는 설, 그리고 향토사학자에 의한 보령의 웅천천을 백강구로 주장하는 등 많은 이견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렇게 백제의 멸망과 관련 된 역사적 사실이 백제의 패망과 함께 패자의 기록이 함께 사라져 후세인들의 의혹을 풀 수 있는 자료가 척박하여 여러 설로 나뉘어 1500년 전의 진실된 역사적 사실을 궁금하게 한다.
홍성지역의 향토사학자 박성흥, 박태신의 ≪진번.목지국과 백제부흥전≫을 읽고 30여년간 내포지방에 발품을 팔며 연구한 노고가 이 책에 스며있다. 역사적 진실이 어느 학설이 옳은지는 유물이라던가 기록의 발굴로 추후에 정확해지겠지만, 그 가능성을 추적해 나가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당군과 신라의 연합, 그리고 부흥군과 왜군의 연합간에 치뤄진 백강 전투가 아산만에서 이루어졌으며, 백제부흥군의 주력부대가 임존성에 주둔하면서 위치비정이 불확실한 주류성의 위치가 홍성군 장곡면 산성리의 학성으로 비정하였다. 이 학성을 두루미城 =두루성=鶴城 =周留城 =州柔城 =沙尸良城 = 石城으로 규정하고 이론의 여지가 없는 임존성과의 지척임을 근거로하여 논리를 전개 하였다.
백제부흥운동의 일환으로 일어난 2차 백강전투(663년)는 백제멸망시 소정방이 이끌고 금강하구에서 벌인 1차전투(660년)와는 달리 아산만에서 이루어졌을거라는 가능성에 이 논문에 일부분 수긍이 간다.
2. 참고자료
1) 고대국가의 추적은 어짜피 많은 가설이 필요하다. 자료가 불충분 하기 때문이다. 퍼즐 맞추듯 짤막한 문헌을 이것저것 모아 남은 확실한 증거인 유물을 목전에 두고 추정하며 현물이나 현장 확인으로 역사적 규명을 해 나가야 한다. 설령 그의 가설이 잘못 인식한 오버라 하더라도 헛수고만 한 것은 아니다. 그물망에 포착되는 많은 추적 대상은 훗날 또 다른 추적자에게 아주 긴요한 자료가 되고 밑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가설은 세밀하고 또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해서 앞뒤가 알차게 짜인 각본과도 같았다. 설사 그가 원하는 대로 얻지 못하였더라도 그의 역사적 행보는 훌륭했다. (고구려 9백 년의 자취소리, 조성원, 해드림 출판사, 2015, 95쪽, 최인호작 ≪왕도의 비밀≫에서 토기문양 '井'을 추적하는 과정을 이야기하며)
2) 우리는 '고구려'라는 나라 이름을 보편적으로 사용한다. 실제로는 이 나라들의 이름에 들어 있는 '麗'자의 발음이 한국이나 중국 공통으로 "나라이름으로 쓰일 때는 '려'가 아니라 '리'로 읽어야 한다."고 되어 있다는 게 문제다. 전문 큰 사전이 아닌 보편적으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사전 중 「大漢韓辭典」(장삼식편,집문당,1988)에는 '고을 려', '나라이름 리'라 하고 뒤에 '高句-', '高-'라는 사례가지 붙여 '고구리', '고리'라고 읽는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 발행 된 「조선어정음훈석」(운곡 제한명 저, 도서출판 문중, 2014)에 의하면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직후에 나온 「월인석보」에서 高麗의 발음을 한글 표기로 '고리'라고 읽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그리고 '고려 때 우리나라가 코리아란 이름으로 서양에 알려졌다.'는 데 대해서도 실제로는 '코리아'가 아닐 수 있다. 영어권에서는 'Korea'라 하여 코리아로 읽을 수 있으나 스페인권이나 동남아에서는 'Choree' 또는 '꼬리'라고 불린다는 점에서 '고려'라고 알려진 게 아니라 ''고리'라고 알려졌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우리 겨례와 연관되는 것으로 거론되고 있는 바이칼 지역의 'Khon'족이 지금도 살고 있으며, 중국 사서에 상고시대 우리와 연관되는 '고리(木+高離)'라는 나라 이름이 나오는 데서도 '고려'가 아니라 '고리'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일부 지역에서 '옛날 옛적'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고릿적'이라는 단어가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옛날의 때'라 설명하고 있듯 살아 있는 우리의 생활언어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고릿적'은 古來라는 한자와 연결 짓는 사람도 있으나 '어릴 적' 등 '적'이 때를 가리키는 말이니 '고릿적'은 '고려 때'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상기 책 387~388쪽 참조)
여기에 덧 붙여 '고릿적'이라는 낱말보다는 예전 풍속 중에 늙은 부모를 생매장 하였다던 '高麗葬'을 일부 지역에서는 '고린장'이라 불렀으니 '고려'를 '고리'라 읽혔음을 증거하는 편린이라 보아도 무방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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