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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의 산(제40편 ; 미산 칠능태산)

1. 들어가며 아침부터 뿌옇게 안개와 미세먼지로 하늘이 뒤덮였다. 산행하기로 한 마음이 뒤바뀌면서 미적거리다가 점심을 먹자 등산화로 바꿔 신고 산으로 향하였다. 칠능태산은 보령댐을 끼고 미산으로 향하는 길 좌측에 남북으로 갈게 위치한 산이다. 등산객이 많지않아 등산로가 없다는 말에 망설였던 산이기도 하다. 잡목으로 나뭇잎에 물오르기 전 올라보기로 한 산이기도 하다. 도흥리로 들어서는 자라실 삼거리에 차를 세우고 다리를 건너 좌측으로 등산로를 찾아보았다. 여러기의 묘로 들어가는 임도로 들어서니 묘지 끝부분 좌우측으로 난 길이 있는데 좌측으로 들어서서 산행로를 찾아보았다. 다행히 붉은 띠지가 펄럭이며 가랑잎이 쌓인 등산로가 희미하게 보인다. 능선까지 헐떡이며 오르니 도흥천이 발아래로 보인다. 북동쪽 사면이 ..

보령의 산 2024.03.03

제178편; 청라 '金凡夫 歸虛自誌'碑

1. 들어가며 소릿골로 귀향하여 몇 년을 살아왔다는 지인을 통해 숲속 바위 위에 글씨가 빼곡한 비석을 보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위 위에 비가 있다면 묘갈명도 아닐 것이고, 무엇인지 궁금하여 그의 안내로 소릿골로 들어섰다. 백월산 줄기의 아랫부분인 해발 150~200m 되는 마을 옆 산을 들어서는 계곡의 한 비탈의 바위 위에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보기엔 몇해 되지않은 듯 보이며, 장비를 사용하여 설치한 듯 높은 바위에 기단돌을 놓고 상하부 2단의 오석을 사용한 비석이 깔끔하게 보였다. 바위에 올라서서 비문을 살펴보니 김범부(金凡夫)의 귀허자지( 歸虛自誌)라 쓰여있고, 세운 시기가 2001년으로 겨우 20여 년 전의 일이었다. 김범부가 누구인지 핸드폰으로 검색해보니 문학작가 김동리의 형으로 나온다. 김범..

제177편 ; 대천 산신당 산신제(2)

1. 들어가며 작년 이맘때쯤 산신제가 열리는 이곳을 찾았지만 제를 지내는 모습을 직접 참관하지 못하여 아쉬움이 남겨있었다. 마침 정월 보름 전날인 오늘 오후 3시에 산신제를 지낸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와 보았다. 작년에 공사 중이었던 봉재터널이 개통되어 지장골 사람들이 시내로 진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주는 것 같았다. 차량을 마을 골목에 세워두고 걸어서 산신당으로 향하는 길엔 겨울 끝을, 봄의 시작을 알리는 듯 새싹들이 움트는 것이 보인다. 미리 제당에 올라와 젯상을 진설하는 아저씨(노재설씨)를 도와주면서 제당 안을 살펴보니, 모시고 있는 산신의 신주인 탱화가 모사된 사진이어서 약간은 실망이 되었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산신당의 신주가 민속화도, 불화도 아님은 격에 떨어지는 듯한 감이 몰려온다...

보령의 산(제39편; 청라 박살뫼(매봉산))

1. 들어가며 경기도 안성의 칠장산에서 태안반도 안흥진까지 약 295km의 산줄기를 금북정맥이라고 칭한다. 청라 소양리 스므티에서 장현리 우수고개까지 약 6.4km에 해당하는 11구간 중 한부분을 다녀왔다. 이 구간은 백월산에서 오서산을 향하는 보령과 청양의 분수령으로 200~300 고지를 오르내리는 순조로운 산행로를 가지고 있다. 예전에 대정산과 안산(살푸쟁이 산)을 다녀온 적은 있었으나, 음현리 뒷산을 가보지 못한 것이 아쉬워 금북정맥 11구간을 연결하여 타보기로 하였다. 우수고개는 위현(渭峴)이라고도 불리며, 조선시대 금정도의 금정역에서 이인도의 청연역까지 연결되었던 중요도로로 질치소로(垤峙小路)에 해당되고, 스므티는 금정역에서 남포로 연결되는 보안원대로(寶安院大路)의 구간에 속하였다. 우수고개를 ..

보령의 산 2024.02.17

보령의 산(제38편 ; 청라 서산)

1. 들어가며 서산(西山, 해발 179.0m))은 오삼전 사람들에게 해가 지는쪽의 산이라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러나, 서산을 복병리 사람들은 복벵이산, 서원마을 사람들은 안산으로 불리었으며, 옛 문객들은 만천봉, 화악(花嶽) 또는 매봉이라 불렀다고 한다. 60년대 청천 저수지가 생기면서 서산을 기대고 살던 많은 사람들이 떠나고 한동안 잊혀진 산이라고 생각했는데, 몇 년전 청천저수지 둘레길이 조성되면서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자리매김을 하는 듯하다. 산 중턱으로 3.1km의 임도가 생겨 더욱 좋아지는 것 같다. 옛 선비들의 싯귀에 많이 응용되는 산이라 한번 올라보리라 생각을 했지만, 등산로가 어떻게 되는지 알 수가 없어 주춤거렸는데, 오락가락하던 봄비가 주춤하자 발길을 떼 보았다. 가느실 주차장..

보령의 산 2024.02.14

보령의 산 (제37편 ; 대천 건지산( 뒷산))

1. 들어가며 옥마산의 줄기가 남서쪽 방향으로 고개를 푹 숙여 궁촌천을 건너서 둘릴산(환산)으로 솟아나 삼지창이 된다. 한 끝은 왕대산 줄기를 형성하여 해망산, 생앵산으로 이어지고, 또 한 끝은 당경산이 되어 소송리쪽으로 끝을 날카롭게하여 바다를 향한다. 삼지창의 가운데 날에 해당하는 건지산은 남곡동과 제석리 사이에 맥을 이어 바다를 향하는데, 주민들은 산 이름은 모르고 대부분 뒷산으로만 알고 재낸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지명을 표기한 지도의 자료가 찾을 수 없다. 위성 지도로 그 부근의 산형태를 살펴보면, 마치 서해바다로 처들어오는 왜구들을 향해 날카롭게 간 삼지창을 겨누고 있는 형상이 보인다. 몇 번인가 한번 오르려고 다짐을 했었지만 어디에서 산의 들머리를 잡아야 하는지 알 수 없기에 미루고 말았는데..

보령의 산 2024.02.11

제176편 ; 화산리 상엿집

1. 들어가며 평생을 고닮프게 살아왔던 인생도 이승을 떠날 때에는 곱게 단장을 해서 보내는 것이 우리네 관습이었다. '60년대 말까지만 해도 동네 어귀 으슥한 곳에는 돌담에 초가 이엉을 얹은 상엿집이 흔하게 있었는데, '70년대 초 새마을 운동이 전국으로 펼쳐지면서 시멘트블록 벽에 함석지붕의 상엿집으로 바뀌게 된다. 세기가 바뀌면서 그것도 꽃상여라는 농협를 통해 간편한 형식으로 바뀌더니, 이젠 매장문화도 화장를 주로하게 되어 상여를 볼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사라졌다. 농촌의 젊은층이 사라지자 상여를 멜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큰 이유 중 하나일게다. '북망산천이 멀다더니 / 이제 가면 언제 오나 / 오는 날이나 알려주오 / 청사초롱 불 밝혀라 / 잊었던 낭군이 다시 온다./ 어허야 어혀 어이야 어여..

보령의 산(제 36편 ; 청라 말미산(駒山))

1. 들어가며 한 갑자 전 초등학교 다닐 때 청라초에서 청천저수지 제방 위로 소풍을 다녀온 기억이 있다. 십 여리가 넘는 신작로를 걸어 궂고개 전에서 말미산 고개를 넘어 제방을 가는 산길 밑은 시퍼런 저수지 물로 무서웠던 기억이 있다. '60년대 초 읍내 간사지의 농수확보와 생활용수 및 홍수로 인한 대천천의 범람을 막기위해 만든 저수지 제방은 '60년대 중반 초등학교 소풍지로 자리매김을 하였던 것 같다. 고향에 돌아와 수시로 궂고개를 지나면서 언제 한번 그때의 소풍길이 흔적으로 남아있는지 가보아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차일피일 미루다가 오늘에서야 발길을 내디뎠다. 소풍길은 향천리 궂고개 아래 양조장에서 말미산 능선이를 넘어 저수지 제방으로 향하였던 길이었으나, 이번엔 말미산 능선이를 쭉 돌아보고..

보령의 산 2024.02.05

제60편 ; 남은들 상여(예산 5)

1. 들어가며 남연군의 묘역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정면 2칸, 측면 1칸의 박공지붕을 한 건물이 보인다. 호기심에 가까이 가보니 상여가 안에 전시되어 있다. 남연군을 이장할 당시에 쓰였던 상여를 광천리 사람들이 증여를 받아 보관해오다가 국립고궁박물관에 기증이 되고, 이곳에는 2012년에 복제품을 전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도에 남은들 상여를 검색해 보면 광천리는 이곳에서도 12.0여 km 떨어져 있는 동네로, 광천리 입구 삼거리(덕산면 광천리 519-1)에도 남은들 상여 보호각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원래 광천리에서 보존하였던 상여를 국립고궁박물관에 기증되고, 복제품을 광천리로 보내지 않고 상가리 남연군의 묘역으로 옮겨 전시 중이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인지 궁금하다. 유리창 안으로 들여다보니 어렸을적에 보아왔..

제59편 ; 가야사지 터(예산 4)

1. 들어가며 남연군의 묘역을 조성하면서 폐사된 가야사는 고려시대부터 전해져오는 오래된 절이었다. 묘역 아래로 절터를 2012년 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발굴조사를 진행 중인데, 현재는 7차 발굴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남연군의 묘역 아래로 넓은 공터가 가야사지 터인데, 그곳에서 불전지로 추정되는 건물을 비롯한 8채의 건물터가 발견 되었으니 대단히 큰 절이었음을 증명하고, 남연군의 묘에 부속되었던 건물터도 중복되어 발굴 됨으로인해 묘 이장에 의한 사찰의 홰손이 사실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잔디밭 위에 소나무와 각종 활엽수가 군데군데 그늘을 만들어 주고, 겨울 햇볕에 영화롭던 건물의 초석만 덩그러니 절터임을 말해준다. 요즈음은 각종 제향행사에 유교식과 불교식을 겸해서 진행하는 방식이 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