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913

제50편 ; 화산 서봉 (연화봉)(중국 5)

1. 들어가며 중원에 우뚝 솟은 화산(華山)은 서악(西岳)으로 꼽히며, 평원에 마치 연꽃 봉우리처럼 아름답게 펼처져 있다고 이름 붙여진 명산이다. 산아래 주차장에서 공원관리소 측이 제공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케이블카 타는 곳까지 가는 길이 여간 험한게 아니다. 금방이라도 바위 덩어리가 굴러 떨어질 것 같고, 버스 바퀴 한쪽이 벼랑쪽으로 빠질 것 같은 걱정이 앞서는데도 운전사는 내려오는 차들과 아슬아슬하게 교행하면서 잘도 달린다. 7~80년대 강원도 운전사들과 실력이 비슷할 것이라 생각하며 좌석에 설치된 안전띠를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다. 셔틀버스에 내려서도 한참이나 여러 계단을 헉헉거리며 올라가야 정거장이 있는데, 중국인들의 상술이 세계적이라더니 관광객의 동선을 상점들 사이사이로 연결하여 걸어야 할 발걸음 ..

제49편 ; 등봉 소림사와 탑림(중국 4)

1. 들어가며 신라가 한반도를 통합한 이후 불교계는 원효와 의상대사로 대표되는 교종이 왕족과 권력층에 의해 발전을 해왔다. 교종(敎宗)은 법상종, 화엄종, 삼론종 등으로 나뉠 수 있는데 형식과 교리, 경전을 중시하는 종파이다. 한편 선종(禪宗)은 교리, 경전 보다 구체적인 실천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을 중시하는 종파로 신라의 후기인 9세기에 당나라에 유학 온 구법승려들에 의해 호족들의 지원을 받아 융성해진 종파이다. 중원의 오악(五岳) 중 중악(中岳)에 해당하는 숭산(崇山)의 산자락에 둥지를 튼 소림사는 북위시대에 세워진 절로, 527년 달마대사가 주지로 부임하면서 수년간 면벽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어 선종의 초조(初祖)가 되었다. 면벽수행을 하느라 건강에 이상이 생기는 수행자들이 많아지자 달마..

제48편 ; 곡부 공림(孔林)(중국 3)

1. 들어가며 공자(B.C 551~ B.C 479)는 하,은,주나라의 왕조가 가장 백성에게 이로운 정치였다고 생각하고, 특히 주나라의 통치개념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며 주나라의 예(禮)와 악(樂)을 바탕으로 제자들을 가르치며 정치실현을 추구하였다. 주나라가 쇠망의 길로 접어들면서 대륙은 혼란에 휩싸이면서 군웅할거하던 춘추전국시대에 접어든다. 그 와중에 수 많은 지식인들은 어떤 정치가 왕에게 혹은 백성들에게 이로울지를 연구하게 되면서 많은 논리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진시황제가 중국대륙을 통일하면서 받아들인 정치논리는 법가(法家)였고, 그 외의 논리들은 통일을 저해하는 요소가 된다며 분서갱유라는 극단의 조치를 강행하게 되어 다른 사상가들은 초야에 묻혀 제자들을 양성하는데 그치게 된다. 유가(儒家)는 그 후 당..

제47편 ; 곡부 공부와 공묘(중국2)

1. 들어가며 곡부는 춘추전국시대 노나라의 도읍지로 공자가 태어난 곳이며 제자들을 모아 가르치던 곳이다. 청도 비행장에서 내려 전날 연태를 들러 답사를 하였고, 다음날은 오전에 제남의 태산을 관광한 후, 공자와 관련된 공묘(孔廟), 공림(孔林), 공부(孔俯)를 답사하기로 일정이 잡혔다. 공묘는 공자가 살면서 교육을 하였던 장소이며, 공림은 공자를 비롯한 공씨 가문들의 유택들로 조성된 공원이며, 공부는 공묘를 중심으로 공씨들이 모여 살던 집단 거류지이다. 공묘 주차장에서 차를 내려 입구로 들어서니 우측으로 성벽과 같이 높고 긴 담장을 끼고, 좌측으로 상점들이 즐비한데 공자의 몇 대손이라는 간판이 눈에 자주 보인다. 상인들의 호객 소리가 성조 때문인지 귀에 거슬리게 들린다. 공묘(孔廟)는 입구에서 대성전을 ..

제46편 ; 태산(중국 1)

1. 들어가며 백제시대에도 영토 내의 높은 산을 오악(五岳)으로 정하고 하늘에 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사회사상사, 노종국, 지식산업사,2010.4) 그에 의하면, 북악(北岳)을 오서산으로 비정하고 있는데, 오산과 오서악은 '烏'자를 공유하고 있으며 백제의 수도 부여에서 보았을 때 모두 북쪽에 자리하고 있고, 오서악의 백제 당시의 이름은 오산이며, 오합사라는 절 이름도 오산과 연계되어 지어진 것으로 보았다. 중국의 중원도 다섯개의 높은 산에 빗대어 북악을 항산(恒山), 동악에 태산(泰山), 중악에 숭산(崇山), 서악에 화산(華山), 남악에 형산(衡山)으로 정하고 황제가 직접 하늘에 제를 지냈다. 산동성 태안시는 지명이 같다는 이유로 충남 태안군과 1997년 4월에 자매결연을 맺어 다양한 교류를 ..

제174편 ; 무염국사 공부길 따라 떠나는 답사(4. 서안 지상사)

1. 들어가며 서안(西安)은 당나라 시대의 도성 장안(長安)이다. 대륙의 중원은 산물이 풍요로워 관내 토족들의 군웅할거와 이민족들의 침탈로 평화로웠던 시기가 별로 없었지만, 당나라가 수도로 삼으면서 한동안 인접 국가는 물론 멀리 유럽까지 실크로드가 연결되어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문화와 문명의 중심지인 국제도시로 거듭나게 된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도 티벳을 거쳐 중국대륙에 꽃을 피우고 다시 아시아 대륙의 곳곳으로 전파되게 되었다. 당과 신라의 연합으로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고, 한반도는 신라와 발해라는 남북국시대를 맞이하게 되지만, 아쉽게도 신라와 발해는 한민족이면서도 교류가 소원하게 되어 각기 당과의 교류를 하면서 경쟁의 대상으로 삼았다. 신라의 왕족과 상층부 자식들은 종교인과 유학생으로 당의 선..

제173편 ; 무염국사 공부길 따라 떠나는 답사(3. 영제 만고사)

1. 들어가며 보령의 향토연구자들은 무염국사가 스승 마곡보철을 마곡사에 머무는 보철 스님일 것이라는 가정하에 중국 최초의 선종사찰이라는 마곡사를 찾았다고 한다. 하지만 마곡사라는 절은 찾지 못하였고, 현재 설화산의 옛이름이 마곡산이라 불리었으며, 그곳에 마곡사라는 이름과 비슷한 만고사(萬古寺)가 있고, 만고사의 일주문에는 '중원제일선림(中原第一禪林)'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기에 이곳을 무염국사가 선종 10조의 심인을 받은 마곡사이거나, 마곡사가 훼철 된 후 근처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의 만고사가 창건된 연대는 854년(당대중 11년)으로 기록되어 있기에 무염국사가 귀국한 이후의 일이라서 확실하게 무염국사가 이곳을 거쳐간 것인지 의문이 들지만, 다보불탑(多寶佛塔)의 안내판을 보면 다보불탑이 처..

제172편 ; 무염국사 공부길 따라 떠나는 답사(2. 낙양 용문석굴과 향산사)

1. 들어가며 도도히 흐르는 이허(伊河)의 물줄기는 천년의 세월을 어제와 오늘로 이어주는데, 정을 쪼으던 장인들과 석굴 속에서 밤낮 없이 진리를 구하던 구도자들, 그리고 축원을 위해 몰려들던 민중들의 기원이 모두 이루워졌을까? 이허의 강물을 사이에 두고 서쪽의 용문산 기슭과 동쪽의 향산 기슭에 위진남북조에서부터 당나라에 걸쳐 암벽에 석굴 사원을 조성하는 사업을 국가적으로 크게 지원을 하였다고 한다. 북위의 효문제가 낙양으로 도읍을 정한 이후(493년)부터 조성된 이곳의 석굴은 무려 2300여 개, 불상은 10만여 개에 달한다. 석굴은 북위 시절에 3분의 1 가량이 설치되고 나머지 대부분은 당나라 시절에 조성되었다고 하는데, 최근에 어느 학자에 의해 신라인이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석굴 '신라상감(新羅像龕)..

제171편 ; 무염국사 공부길 따라 떠나는 답사(1. 연태 양주묘)

1. 들어가며 보령문화원에서 매년 시행하던 '무염국사 공부길 따라 떠나는 답사(3차)'가 코로나 발생으로 4년 간 중단 되었다가, 올해 10월 11일(수)에 5박 6일의 여정으로 진행되었다. 무염국사(800~888)는 통일신라시대에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성주사를 중창하고 구산선문 중 성주산문을 연, 성주사지에 남아있는 고운 최치원 선생이 찬한 국보 낭혜화상비의 주인공으로 보령지역의 위대한 인물이다. 무염국사는 무열왕의 9대손으로 유교경전을 공부하였으나 불교로 출가를 하여 18세(818년) 때 영산강 하구에서 중국으로 향하는 사단(斜斷) 항로로 가다가 난파 당하여 실패하고 22세(822년) 때 다시 당은포(현 남양만 전곡항 추정)에서 출발하는 횡단(橫斷) 항로를 이용하여 왕자 흔이 조정사로 중국에 가는..

제45편 ; 일두 고택 (함양 4)

1. 들어가며 남계서원에서 강을 건너 약 3km 떨어진 개평마을에는 중요민속문화재 제186호로 지정된 일두고택이 있다. 경남지방의 대표적인 전통한옥으로 대지 3천여 평, 12동의 건물로 일두 정여창 선생이 세상을 뜬 뒤인 1570년 후손들에 의해 사대부가의 면모를 갖추어 건축되었으며, 1843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조성되었다고 한다. 골목에서 행랑채 사이로 난 솟을대문에 들어서면 누마루가 붙어있는 사랑채가 보인다. 사랑채는 마당에서 1.2m 정도 높이에 기단을 조성하고, 누마루를 높여 통풍과 풍광을 즐길 수 있도록 조성해 놓았다. 외부인이 안채로 들어가는 것을 통제하기 위한 좁은 중문과 별채에서 외부로 나갈 수 있도록 작은 홍예문을 설치한 것이 흥미롭다. 유가(儒家)에서는 조상의 음덕을 받고자 사당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