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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편 ; 가야산 남연군의 묘(예산 3)

1. 들어가며 상가리 미륵불을 답사하던 중 건너편 작은 동산 위에 무덤이 있는 것이 보였다. 지도를 보니 남연군의 묘이다. 전국의 풍수가들이 답사하여 학습하는 코스 중 유명한 곳이라, 예전부터 나도 한번 방문하리라 마음은 있었지만 지금까지 방문하지 못하였는데 우연치않게 기회가 온 것이다. 미륵불과 묘역까지는 직선거리로 500여m에 불과하지만, 차량을 옮길 필요가 있기에 아랫동네로 내려가 삼거리에서 우회전을 하여 남연군 묘역에 주차를 시키고 경내로 들어갔다. 흥선대원군이 아버지의 묘를 경기도 연천에서 이곳으로 이장을 하게된 연유가 후손들 중에 왕이 나올자리라 하였다는데, 과연 풍수에 밝지 않은 일반인이 보기에도 좋은자리임을 알 수 있겠다. 가야산 높은 줄기가 사방을 둘러쳐지고 남동쪽으로 수계가 빠져나가는 ..

제57편 ; 상가리 미륵불(예산 2)

1. 들어가며 덕산면 상가리는 남쪽으로 원효봉(해발 604.7m)과 서쪽엔 가야산(해발 678.2m)이 주봉을 이루고, 북으로 가면서 옥양봉(해발 621.2m)과 옥산으로 가는 고갯길을 내주고, 북동쪽으로 서원산(해발 473.2m)으로 산맥이 이어지며 남동쪽으로 덕산으로 통하는 길목을 내주는 형태의 지형을 가지고 있어 예전부터 명당자리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아버지묘를 이곳에 쓰고자 가야사라는 절을 폐사시켰다는 역사적 사실과, 병인박해 때 독일인인 오페르트가 1868년 덕산 구만포에 상륙하여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발각되어 달아난 사건 때문에 대원군이 더욱 쇄국정책을 쓰게 된 원인이 되었던 근원지이기도 하다. 상가리 미륵불이 가야사 경내에 위치하다가 폐철 당시 이곳으로 옮겨졌는지, 혹..

제56편 ; 석곡리 미륵불과 석탑(예산 1)

1. 들어가며 대천천과 지곡천이 삽교천으로 합류하는 곳의 평야지대 부근에 위치한 석곡리는 야트막한 구릉으로 형성된 지형을 가진다. 옛 절터가 마을회관 동쪽 150m되는 지점이라고 하니 용고길 옆 밭 부근(석곡리 389-1)인 것 같고, 폐사의 원인이 난리 중 화마라는데, 18세기 초이면 외세의 침략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당쟁에 의한 정국혼란으로 충청, 경상, 전라도에서 일어났던 무장반란인 '이인좌의 난(1728)'에 의한 홰철로 추측할 수도 있겠다. 옮겨진 불상의 높이는 대략 높이 250cm, 몸통 넓이 100cm이고, 몸통 두께는 40~50cm이며, 얼굴의 크기는 60~70cm로 4등신 정도로 몸통에 비해 얼굴이 크다. 머리에 보관을 썻는데 윗부분이 평평한 것은 보개를 얹기위한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

제55편 ; 영인 신현리 미륵불(아산)

1. 들어가며 보령의 미륵모퉁이라는 미륵불에 대하여 궁금증을 풀어내기 위해 주변의 미륵불및 석불을 답사하기로 하였다. 우선 근동의 기호지방에 있는 미륵불을 지자체의 홈페이지를 방문하여 문화재로 등록된 미륵불의 조사하고, 아산과 예산 지역에 있는 영인 신현리 미륵불, 석곡리 미륵불, 상가리 미륵불을 답사하기로 하였다. 아산에 위치한 영인 신현리의 미륵불을 방문하기 위해 아산시 홈페이지에 기록된 주소인 '신현리 186번지'를 찍고 현장에 와서 보니 공사현장사무실이 자리하고 있다. 근간에 공사 때문에 미륵불이 옮겨졌는지 당황스러웠는데, 지나가는 주민에게 물어보니 버스정류장에서 야산쪽으로 들어서야 한다고 한다. 주민의 말대로 그 위치에 가서보니 미륵불이 남쪽을 향해 웃는 모습으로 서 있다. 지자체는 홈페이지에 ..

보령의 산(제35편 ; 미산 병목산)

1. 들어가며 낙엽이 떨어지고 농삿일이 끝나면서 몸뚱아리가 근질 거리기 시작한다. 등산로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산봉우리들의 탐방에 마음이 끌리어 작년 봄에 멈추었던 스틱을 잡아 보았다. 깊숙한 도흥리 골짜기를 따라 비득재 정상 농장 앞에 차를 대고 임도에 들어서니 좌측능선으로 띠지들이 듬성듬성 보인다. 초입에 잡목들로 약간 주춤거리다가 선명하지 못한 등산로를 찾아 산속으로 들어선다. 정비되지 않은 산행로에 가랑잎으로 펼쳐지는 짐작되는 길로 한걸음 한걸음 찾아 올라보는데 산행객보다도 산짐승들의 발길이 더 많았을 것 같다. 두어번의 가파른 언덕을 오르자 바로 정상이 보인다. 나무들에 의해 주변의 풍광은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낙엽이 진 뒤에라 홍산 땅이 보인다. 멀리 옥산저수지도 보인다. 정상에서..

보령의 산 2023.12.11

제54편 ; 옹진 승봉도(인천)

1. 들어가며 가을이 익어가는 계절에 학우들과 인천 앞바다의 승봉도를 찾았다. 연안부두에서 서남방향으로 여객선으로 한시간 반 가량을 달리면 자월도를 거쳐 소이작도와 대이작도와 가까이 면적 6.39km의 작은 섬 승봉도에 닿는다. 가구 수가 80여 호, 주민 수가 70여 명이란다. 육지로의 이주가 지속적으로 이뤄져 빈집이 많아지고 있다는 뜻일게다. 주민들은 적은 농지에 농사를 지으며 어업을 겸업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척박한 섬 살림을 활성화하기 위해 인천의 도심과 연계하여 식당, 팬션, 상가들을 운영하고, 섬지역을 여행하는 관광객들을 모집하여 바지락 체험, 꽃게잡이 체험, 선상낚시 체험 등과 섬 둘레길 답사를 겸한 여행 프로그램을 만들어 섬 주민의 수익 창출에 활발하게 힘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승봉리 ..

제175편 ; 청라 김성우 장군 추모 제향

1. 들어가며 양력 11월 1일 11시에 추모 제향 행사가 시작 되는 것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첫 번째인 1(하나)를 의미한다는 진행자의 말처럼,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개국하는 과정에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으로 승화한 장군의 넋을 기리고자 장군봉이 바라다 보이는 발산에서 추모행사가 열렸다. 발산(鉢山)을 지역 사람들은 '바래미' 혹은 '바리미'라고 불리었다. 발산이라는 지명이 국내에서도 여러곳에 산재하는데, 이것은 둥그스름하고 밋밋한 동산의 형태를 가진 지형을, 즉 절에서 승려들이 쓰는 밥그릇 바리때를 엎어 놓은 형상의 지형을 말하는데 우리땅 이름이 한자화 하면서 발(鉢 ; 바리때 발)로 변형된 것으로 본다. 제향을 지내는 동안 청천저수지에서 라원 들판을 통해 불어오는 바람이 골바람이 되어 현수..

제53편 ; 서안 비림박물관(중국 8)

1. 들어가며 비림(碑林)은 원래 공자를 모시던 사당이었다. 그러나 북송 원우 2년(1087년)에 건설된 것으로 지금까지 9백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한나라로 부터 근대까지의 비석, 묘지를 4천 개 정도 보존하고 있으며, 서안에서 수집한 비석 1,000여 점을 보유한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글과 그림을 새긴 비석들이 숲처럼 빽빽하게 들어 섯다하여 비림이라 불린다. 비림박물관은 무덤의 비석, 공적비, 서예가의 작품이라는 세가지 요건을 갖춘 비들을 모아 전시를 하는데, 비림에 보존하고 있는 비각은 시대의 순서가 완전하고 각종 서법이 겸비되어 가치가 높다. 정문을 들어서면 비림(碑林)이라는 비각이 세워져 있고, 그 안에 기단부과 몸체, 갓머리로 구성된 석대효경(石臺孝經)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당현종이 ..

제52편 ; 서안 회민거리, 장안성(중국 7)

1. 들어가며 중국에 들어온 아랍인들이 중국인들과 결혼해 정착하며 살아온 민족이 회족(후이족)이다. 당나라 시대 종교가 다른 이민족들을 수용하면서 회족들은 장안의 고루와 종루에 가까이 이슬람사원을 세우고 정착하기 시작하였는데, 아편전쟁 당시 170여 만명이 거주하였다는데 현재는 산서성에 사는 인원이 5만여 명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회족거리에는 야시장을 즐기려는 관광객들과 젊은이들로 넘쳐나고 있다. 간단하게 간식을 즐길 수도 있으며, 상품을 구매하기도 한다. 회민거리 끝으로 나오면 종루와 고루가 있는 광장이 나오는데, 관광객과 시민들이 어울려 시안의 밤풍경을 즐기고 있다. 고루 중앙엔 큰 북을 달고, 사방으로 24절기를 표시하는 작은 북을 달려 있으며, 북을 치는 것으로 성문을 열고 닫았다고 한다. 장안..

제51편 ; 서안 진시황 병마용갱(중국 6)

1. 들어가며 고조선이 멸망하던 시기보다 이른 시기인 기원전 221년에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하고 시황제(始皇帝)라 칭하였다. 시황제는 군현제 실시, 진문자로 통일, 만리장성 개축, 아방궁 건설 등으로 강력한 법치를 행하여 영원한 제국을 세우며 불사의 꿈을 실현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진시황도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고 진나라도 얼마되지 않아 역사속에 사라진다. 1974년 이곳에 살던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이상한 점토 파편을 발견하게 되면서 2,200년 전에 묻힌 진시황릉의 실체를 세상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병마용갱의 부지는 상당히 넓게 조성되어 있는데, 이는 당국에서 유물의 발굴지가 어디까지인지 불확실하기에 최대한 부지를 넓게 확보하고 보존하기 위함이란다. 이 지역 어디든 삽으로 땅을 파면 유물이 나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