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외 유적지 탐방

제58편 ; 가야산 남연군의 묘(예산 3)

푸른나귀 2024. 2. 5. 10:41

1. 들어가며

 

   상가리 미륵불을 답사하던 중 건너편 작은 동산 위에 무덤이 있는 것이 보였다.

 지도를 보니 남연군의 묘이다. 전국의 풍수가들이 답사하여 학습하는 코스 중 유명한 곳이라, 예전부터 나도 한번 방문하리라 마음은 있었지만 지금까지 방문하지 못하였는데 우연치않게 기회가 온 것이다.

 미륵불과 묘역까지는 직선거리로 500여m에 불과하지만, 차량을 옮길 필요가 있기에 아랫동네로 내려가 삼거리에서 우회전을 하여 남연군 묘역에 주차를 시키고 경내로 들어갔다.

 흥선대원군이 아버지의 묘를 경기도 연천에서 이곳으로 이장을 하게된 연유가 후손들 중에 왕이 나올자리라 하였다는데, 과연 풍수에 밝지 않은 일반인이 보기에도 좋은자리임을 알 수 있겠다. 가야산 높은 줄기가 사방을 둘러쳐지고 남동쪽으로 수계가 빠져나가는 형상이니 꿩이 알을 품고 있는 포란형의 지세임이 틀림 없겠다.

 

 조선시대 후기에 대원군이 절을 폐사시키고 자신의 아버지 묘를 이장하였다고 하는데, 폐사시키는 방법이 불태우고 탑을 부수는 것이었다하니 당시 불교계가 얼마나 천대 받았는지 추측이 된다.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이 이 묘를 이장한 후에 태어나고 훗날 고종황제가 되었다는 사실에서 묫자리가 풍수학의 정통성을 주장하지만 글쎄다.

 남연군의 묘역은 수년동안 발굴조사와 재단장을 진행하고 있는 듯 봉분 앞뒤가 파여져 있다. 묘 마당으로 바위가 돌출되어 있는데 이는 묘지 조성 당시에 작은 동산을 흙으로 성토한 후 묘지를 조성한 듯 보였다.

 전면에 세워진 비석에는 남연군과 부인 여흥민씨의 묘임을 흥선대원군의 필체로 각인되어 있다.

 왕족임에도 '릉(陵)'이라 칭하지 못하고, 서민과 같이 '묘(墓)'라 칭하게 된 것이 조선말기 왕권과 국력이 허물어져가는 시기에 대원군의 아들이 황제에 올랐기 때문일까?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아버지를 이곳으로 옮긴 진정한 꿈이, 자신의 아들이 망해가는 왕조의 황제에 오르는 것이었을까? 고종이 막강한 권력을 가졌었더라면 아비인 흥선대원군이나 할아버지인 임해군에게 사후 왕위를 내렸을 수도 있었을 것이리라. 

 그래도 가야산 줄기는 예나 지금이나 묵묵히 이곳을 바라다보고 부질없는 인간사를 비웃고 있는 듯하다. 

 

 

2. 참고자료

 

    @ 위치 ;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5-29

    @ 지정 ; 충청남도 기념물 제 80호

 

  ◎  남연군의 묘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이구(李球)의 무덤이다. 원래 경기도 연천 남송정에 있던 것을 1846년에 이곳으로 옮겼다.

 이구(?~1822)는 인조의 셋째 왕자 인평대군(麟坪大君)의 후손으로 정조의 이복동생 은신군(恩信君)에게 입양되어 남연군에 봉해졌다. 아버지 은신군이 모함을 받아 제주도에서 죽자 왕족이면서도 불우한 삶을 보냈다. 아들은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다.

 이하응이 아버지의 묫자리를 찾던 중 가야산에는 '2대에 걸쳐 왕이 나오는 자리'가 있고, 오서산에는 '만대에 영화를 누리는 자리'가 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가야산을 선택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자리에 가야사(伽倻寺)라는 오래된 절이 있어 대원군은 절을 없애고 남연군의 묘를 옮겼다. 훗날 대원군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고종(高宗)이다.

 1868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의 묘를 파헤쳤지만 관은 건드리지 못한 채 돌아간 사건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과 천주교 탄압은 더욱 강화되었다. (현장 안내판 발췌)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이구(李球, ?~1822 )의 무덤이다.

     대원군 이하응이 풍수지리설에 따라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올 자리라는 말을 듣고 원래 경기도 연천에 있던 남연군의 묘를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이곳에는 가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절을 불태우고 탑을 부순 후 이장했으며, 이장한지 7년 후에 차남 명복이 태어났는데 그가 곧 철종의 뒤를 이어 12세에 왕위에 오른 고종이다.

 그 후 1866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일이 있었으며, 이 일로 대원군이 서양에 대한 배척을 강화하는 쇄국정책을 실시하고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묘는 높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무덤 주변에서 조선시대의 기와가 많이 나왔다고 전해진다.(예산군 홈페이지 발췌)

 

   @ 가야산로 입구의 삼거리에 세워진 안내 표지판

   @ 가야산 줄기로 둘러쳐진 포란형의 지세에 위치한 남연군 묘 

   @ 남연군 묘 앞에 세워진 상석과 석등 등 석물들

   @ 흥선대원군이 글을 쓴 비석. 정적이었던 며느리 명성황후와 어머니가 여흥 민씨이다.

   @ 봉분 앞 좌우에 서 있는 동물형태의 석물인 석양(石羊)

   @ 망두석이 위치한 지형에 바윗돌이 보인다. 묘를 쓰기 위해 성토로 보완을 하였나보다.

   @ 지속적으로 유물조사와 보완 작업이 진행 중인가 보다. 전후면 경사면이 파헤처져 있다.

   @ 남연군의 묘 현장 안내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