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시(탈고) 17

밤비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꿈결 속에 헤매다 뒤척거린다. 언뜻 지나간 청춘이 언제였는지 매듭을 이어가는 한줄기 인생을 오늘도 빗소리에 놀라 다시 이어간다. 가느다란 거미줄에 바동대며 탈출하려는 잠자리와 명주실 뽑아내며 옭아매려는 거미가 끈을 놓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거미줄 같은 삶의 이어감을 내려놓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잊으며 살아간다. 다시 잠들기 어려운 밤의 전령이 창문을 서성이며 줄다리기를 조르고 있는 중이다. * 작가와 문학 20호(2021.10) 기고 작

서정시(탈고) 2021.10.18

가설극장

장마당이 높은 광목천으로 가려지고 북과 나팔을 울리며 한 무리 광대가 마을을 돈 후엔 달님도 깊은 잠에 빠져들고 별빛 어스름한 논두렁 길 어른, 아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잰걸음 소리에 놀라 풀벌레 개구리울음 멈추게 하고 발동기 돌아가는 소리 빗줄기 퍼붓는 장막에 부딪혀 화면이 춤을 추어도 눈물 그렁그렁 두 눈 반짝거리던 ‘저 하늘에도 슬픔이’ 살짝 열어둔 창문 틈새로 고해 속 뒤척임에 빠진 아스라이 건너편 그 개구리 그날처럼 함성 지르며 장막 속으로 어여 오라 하네. * 어여 ; ‘어서’의 사투리 * 작가와 문학 20호(2021.10) 기고 작

서정시(탈고) 2021.10.18

그리움

그곳에 가면 기다림이 있다. 낮은 언덕 뒤에 얹고 구절초 흐드러진 덤불 속 엇비스듬히 초가삼간 누워 있다. 토방에 놓인 검정 고무신 한 짝 그 집에 살던 아이의 웃음소리 들리는 듯하고 기울어진 부엌 문짝에 거미가 주인 되어 왕국을 차렸지만, 아궁이에 밥 짓는 연기가 그을림이다. 하얀 박꽃 달맞이하던 지붕엔 보랏빛 칡꽃 이엉을 대신하는데 쥔장은 어디로 마실 갔는지, 솔바람만 흐느적거리며 무심하다. 언제인가 마실 간 쥔장이 헛기침하며 사립문을 들어설 때, 검정 고무신 주인도 재잘거리며 찾아올 터인데 그 집은 그대로 있겠지 그 아궁이에도 불은 붙여지겠지. * 마실 ; ‘마을’의 방언, 마을 가다.(관용) ; 이웃에 놀러 가다. * 문학지 ' 작가와 문학 가을겨울호 2020' 기고 작.

서정시(탈고) 2020.11.09

사금파리

고라니가 주인 되어 뛰노는 골짜기 천수답에 물꼬를 대러 온 농부의 발길에 놀라 덤불 속으로 숨어든다. 새파란 하늘이 쨍그랑 소리 내며 깨질 듯 반짝이며 눈에 들어온 사금파리 한 조각 오래전 어느 장인의 혼과 손길이 묻어 있는 지 사기막골 이젠 이 골짜기 지명도 사그라져 불러주고 들어주는 이 없지만, 고라니 발바닥에 사금파리 비췻빛 어리겠지 멧돼지의 콧잔등엔 옛 도공의 혼은 묻어나겠지. * 사기막골 - 보령시 청라면 의평리 갬발 저수지 위쪽의 옛 지명으로 사기를 굽던 가마가 있었다는 골짜기. * 문학지 '작가와문학 가을겨울호 2020' 기고 작.

서정시(탈고) 2020.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