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시 167

토룡의 변(土龍의 辨)

어디를 가던 길이냐고 묻진 않으마. 지나온 흔적마저 화석이 되어 논두렁에 멈춰버린 너의 나신(裸身)이 검은 가죽만 남긴 채 풀냄새 흙 내음마저도 느끼지 못하고 하늘의 빗소리만 기다리누나. 건너편 물 대인 논에는 백로의 긴 주둥이가 널 기다리고 트랙터의 뒷바퀴가 거대할진대 잠깐 내린 여우비에 온 세상이 네 세상인 양 그 길을 꼭 건너야만 했단 말이냐? 박제되어 꼬부라진 너의 몸뚱이를 누가 기억해 준단 말이냐?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노란 유채꽃 이파리만이 지렁이의 주검 위로 무심하게 흩날릴 뿐이다. * '작가와 문학 제19호' 기고 작

서정시 2021.05.22

한내천

갈대는 바람을 탄다. 수줍은 듯 서석거리며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바람이 없으면 없는 대로 눈길을 한 곳으로 한다. 여울은 구름을 탄다. 뛰어가는 듯 재잘거리며 구름이 흐르면 흐르는 대로 구름이 없으면 없는 대로 발길을 한 곳으로 한다. 바람이 숨을 쉬면 개개비들의 놀이터가 되고 구름이 그늘이 되면 피라미들의 춤사위가 시작된다. 한내천 여울물 은빛 파도를 헤치며 궁둥이를 하늘로 자맥질하는 물오리의 주둥이엔 물이끼가 未完의 詩가 묻어난다. * 한내천 ; 보령시 중심을 흐르는 지방하천 대천천의 옛 이름 * '작가와 문학 제19호' 기고 작

서정시 2021.05.22

애장터

찔레꽃 하얗게 구름 피워 여린 순을 내어주고, 무덤 가 삘기에 달큼한 물이 오르며 시큰한 시엉 풀이 우릴 유혹할 때, 엄니는 뒷산 모퉁이를 가지 못하게 말렸다. 품에 안은 어린 자식 거적에 둘둘 말아 아비의 지게를 타고 찔레꽃 내음 가득한 그곳에 내려졌다. 돌멩이 하나 눌러놓고 표적으로 삼았다지만, 밤마다 들려오는 아기의 울음소리에 엄니는 그곳을 가지 못하게 말렸다. 그 아이 때문에 어미의 젖가슴을 빼앗겼다. 그 아이 때문에 할머니의 빈 가슴만을 차지했다. 한 갑자 지난 건너편 대고모 할머니의 품에서 그 아이와의 헤어짐에 그렇게도 울어댔던 조각이 산모퉁이 덤불 속에 남아 있을 것 같아 그곳을 찾아보았지만 돌멩이는 알아볼 수 없었다. 바람은 찔레 향을 떨치고 달려간다. * 시엉 ; ‘시다’의 방언 활용형으..

서정시 2020.10.04

석류 꽃

파릇함이 퍼지던 나뭇가지 사이 붉은 입술 훔치며 살포시 얼굴 내밀더니 가을 문턱 들어서던 어느 날, 입술 안으로 자수정 이빨을 보이며 날카로운 가시로 무장하곤 속살을 감추듯 보여준다. 석류의 붉은 치아가 내 입술을 유혹을 하고 쉽사리 다가서질 못하게 장벽을 치지만, 톡 소리 상큼하게 터지며 신맛으로 사랑의 정열을 대신하는 사랑하고픈 여인의 입술이다. 산속에 숨어있는 옹달샘이 젊은 청춘 설레게 하고 숨을 헐떡이게 하는 가슴앓이 불러오듯 석류의 알갱이는 보일 듯 말 듯 보여주지 않는 맛으로 심장에 대못이 박히는 통증으로 내게 다가온다. * 이미저리 4호(2021.10) 기고 작

서정시 2020.07.13

과꽃

함초롬히 피어난 자줏빛 꽃잎 속에 노란 보석 알갱이 품어 내 사랑이 당신 사랑보다 더 깊음을 가을 하늘에 말하려 하고 수줍은 듯 고개 숙인 붉은 꽃잎 속에 연둣빛 진주 알갱이 품어 추억 속의 사랑을 머금은 그 사연을 가을바람에게 전하려 한다. 고추잠자리 유영을 쫓아 흔들거리는 과꽃들의 찬미하는 속삭임 속에 지난 이야기가 실려 퍼진다. 연보랏빛 치마에 곱게 빗어 올린 머리 밝은 웃음 던지며 옛이야기는 하지 말라던 그 여인 과꽃이 전하려 했던 그 목소리가 바람 타고 구름 타고 과거 속 천상으로 달려간다. 수줍게 피워낸 하얀 얼굴 내 작은 꽃밭에 넘실거린다.

서정시 2020.07.12

다듬이 연가 (戀歌)

제목: 다듬이 연가 일제의 수탈을 피해 늦은목 고개를 넘어올 적에 할아버지 지게에 보름달과 함께 얽매어 옮겨졌다. 할머니는 장항선 완행열차에 이불 보따리를 얹을 때에도 그것이 귀물인 양 들치어 메고 서울로 향하였다. 산동네 쪽방 신세 이곳저곳 옮겨 다닐 적에도 엄니는 신주 단지 모시듯 옮기었다. 서울에서 처음으로 내 집이 생기던 날 어쩌지 못해 한동안 옥상 귀퉁이에 팽개친 채로 비를 맞으며, 눈을 맞으며 쳐다볼 일이 없었는데 고향으로 회귀를 결심하던 날 또각또각 다듬이 소리가 귀에 들려온다. 이제는 손주 며느리가 자리잡아준 정원에서 달빛 받으며 도란도란 할머니와 엄니의 손놀림이 춤을 춘다. 늦은목 고개 마루엔 그 방망이 소리를 기억하는 벼락 맞아 일그러진 신목(神木)이 있다. * 늦은목 고개-보령시 청라..

서정시 2020.0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