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외 유적지 탐방 65

제65편 ; 내덕리 석불미륵입상(홍성 5)

1. 들어가며 홍성 종합터미널에서 약 3.4km 떨어진 어경마을회관 건너편 야트막한 구릉 대나무 숲 앞에 미륵불이 모셔저 있다. 전설에 의하면, 아주 먼 옛날 힘이 장사인 한 장군이 어깨에 미륵불을 모시고 가야산에서 대흥산으로 모시고 가던 중 이곳에 떨구었다고 한다. 그 장군은 이곳이 미륵이 점지한 정토임을 인지하고 터를 마련하였다고 한다. 이 미륵에게 정성을 다하여 자식을 점지하였다는 이동네 이장님의 구술을 들었으며, 음력 2월 초하루 지자체의 지원을 받아 마을제를 지내고 있다고 하였다. 이장님의 걱정은 미륵불과 주변의 관리에 대하여 많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주춧돌 위로 기둥을 세워 초가로 누각을 만들어 비에 의한 풍화를 막았었는데, 누각이 없어진 지금은 전에 비하여 급속도로 풍화가 진행되고..

제64편 ; 대교리 석불입상(홍성 4)

1. 들어가며 대교리 석불입상을 찾아가며 또 혼란을 겪었다. 현장 안내판의 주소가 '대교리 408번지' 또는 '의사로 63번길 9'로 적혀있어 홍성천의 하천부지 주차장을 가리킨다. 미륵불은 동네 어린이공원 한켠에 남향으로 세워져 있는데, 노출 높이가 3.3m이고, 어깨폭이 0.9m이며 몸통두께가 0.4m이다. 머리의 높이가 1.0m로 지상부에 돌출 된 것으로는 3등신에 해당한다. 연약질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조각하기 쉬운 잇점이 있겠지만 풍화가 지속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을 터인데도 동 시대의 작품으로 보아선 상태가 좋은편이었다. 아마 땅속에 오랫동안 뭍혀있다가 농부에게 발견이 되어 다시 햇빛을 보게 된 덕일 것이다. 전체적인 균형미가 무시되고, 자비에 찬 눈웃음이 부족하지만 그 시대를 살아가던 민초들의 ..

제63편 ; 덕산 신평리 미륵돌(예산 8)

1. 들어가며 덕산면사무소에서 윤봉길의사 기년관 쪽으로 약 1.8km 정도 가면 버스 정류장이 나온다. 그 옆 건물 앞 도로변에 신평리 미륵돌이 세워져 있다. 한 평 남짓 스텐 난간대로 보호를 받고 있는 미륵불은 비스듬하게 세워져 있는데, 도로변 보다 지대가 낮게 되어 있다. 아마 도로가 넓혀지며 기존 지대보다 높아진 탓에 땅속으로 들어간 현재의 모습이 된 것 같다. 읍내리 미륵불과 흡사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측면과 후면의 조각을 생략하고 불상의 손 위치가 같다. 불상의 높이는 매립부분을 제외하고 2.5m에 달하고 어깨 폭이 0.9m, 몸통 두께가 0.4m이며 보개는 0.9*0.5*0.3m가 된다. 얼굴 길이가 1.2m로 몸체의 절반에 해당하는 2등신불로 보이는데 아마 무릎 아래로 매립된 부..

제62편 ; 덕산 읍내리 미륵불(예산 7)

1. 들어가며 덕산면 읍내 사거리에서 송산교차로 쪽으로 약 200m 정도 가면 우측의 하이카프라자 건물이 있는데, 옆 건물과의 담장 사이에 숨어있듯 한 미륵을 만날 수 있다. 마치 달걀처럼 둥그스름한 껍데기 속에 들어있는 듯한 모습의 입상인데, 화강석의 통돌을 전면부만 다듬은 부조형식을 띤 미륵불이다. 하부가 일부 땅에 묻힌 것으로 보이는데, 지상부의 높이가 2.2m이고, 어깨폭 0.8m, 몸통 두께 0.4m, 얼굴 길이 0.7m이고, 관모 상부의 보개는 0.8*0.7*0.1로 상부에 갓모양이 돌출되어 있다. 지표면 위로 나타난 크기로는 3등신으로 보이는데, 아마 땅속에 묻힌 하부를 생각하면 4등신불이 될 것 같다. 얼굴의 형상은 토속적인 냄새가 물씬나며,관모의 형태가 비교적 낮고 위에 보개돌이 얹어 있..

제61편 ; 대흥 동서리 미륵불(예산 6)

1. 들어가며 아침부터 봄비가 주적거리며 내리기에 밭일을 멈추고, 미루었던 내포지역 2차 미륵불 답사를 진행하였다. 화성에서 619번 지방도를 따라 23km 정도가면 예당 저수지를 끼고 좌측의 도로변에 위치한다. 나무 홴스 안에 서 있는 이 미륵불은 마을에서는 망태할아버지로 불리우고 있으며, 매년 음력 2월 초하룻날 마을의 안녕을 위해 제를 지낸다고 한다. 미륵은 전면의 저수지를 향해 동향으로 서 있는데, 원래 송림사라는 유적에서 일제시대에 대흥면사무소로 옮겨지고, 그후 대흥초등학교 교정으로 다시 옮겨진 후, 일제말기 지금의 자리로 옮겼으나 근래 도로확장으로 조금 뒤로 물러선 현재의 위치로 수없이 옮겨짐을 당해야 했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풍화가 많이 진행되어 불상인지, 문인석인지 잘 구별이 가지 않지만 ..

제60편 ; 남은들 상여(예산 5)

1. 들어가며 남연군의 묘역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정면 2칸, 측면 1칸의 박공지붕을 한 건물이 보인다. 호기심에 가까이 가보니 상여가 안에 전시되어 있다. 남연군을 이장할 당시에 쓰였던 상여를 광천리 사람들이 증여를 받아 보관해오다가 국립고궁박물관에 기증이 되고, 이곳에는 2012년에 복제품을 전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도에 남은들 상여를 검색해 보면 광천리는 이곳에서도 12.0여 km 떨어져 있는 동네로, 광천리 입구 삼거리(덕산면 광천리 519-1)에도 남은들 상여 보호각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원래 광천리에서 보존하였던 상여를 국립고궁박물관에 기증되고, 복제품을 광천리로 보내지 않고 상가리 남연군의 묘역으로 옮겨 전시 중이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인지 궁금하다. 유리창 안으로 들여다보니 어렸을적에 보아왔..

제59편 ; 가야사지 터(예산 4)

1. 들어가며 남연군의 묘역을 조성하면서 폐사된 가야사는 고려시대부터 전해져오는 오래된 절이었다. 묘역 아래로 절터를 2012년 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발굴조사를 진행 중인데, 현재는 7차 발굴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남연군의 묘역 아래로 넓은 공터가 가야사지 터인데, 그곳에서 불전지로 추정되는 건물을 비롯한 8채의 건물터가 발견 되었으니 대단히 큰 절이었음을 증명하고, 남연군의 묘에 부속되었던 건물터도 중복되어 발굴 됨으로인해 묘 이장에 의한 사찰의 홰손이 사실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잔디밭 위에 소나무와 각종 활엽수가 군데군데 그늘을 만들어 주고, 겨울 햇볕에 영화롭던 건물의 초석만 덩그러니 절터임을 말해준다. 요즈음은 각종 제향행사에 유교식과 불교식을 겸해서 진행하는 방식이 존..

제58편 ; 가야산 남연군의 묘(예산 3)

1. 들어가며 상가리 미륵불을 답사하던 중 건너편 작은 동산 위에 무덤이 있는 것이 보였다. 지도를 보니 남연군의 묘이다. 전국의 풍수가들이 답사하여 학습하는 코스 중 유명한 곳이라, 예전부터 나도 한번 방문하리라 마음은 있었지만 지금까지 방문하지 못하였는데 우연치않게 기회가 온 것이다. 미륵불과 묘역까지는 직선거리로 500여m에 불과하지만, 차량을 옮길 필요가 있기에 아랫동네로 내려가 삼거리에서 우회전을 하여 남연군 묘역에 주차를 시키고 경내로 들어갔다. 흥선대원군이 아버지의 묘를 경기도 연천에서 이곳으로 이장을 하게된 연유가 후손들 중에 왕이 나올자리라 하였다는데, 과연 풍수에 밝지 않은 일반인이 보기에도 좋은자리임을 알 수 있겠다. 가야산 높은 줄기가 사방을 둘러쳐지고 남동쪽으로 수계가 빠져나가는 ..

제57편 ; 상가리 미륵불(예산 2)

1. 들어가며 덕산면 상가리는 남쪽으로 원효봉(해발 604.7m)과 서쪽엔 가야산(해발 678.2m)이 주봉을 이루고, 북으로 가면서 옥양봉(해발 621.2m)과 옥산으로 가는 고갯길을 내주고, 북동쪽으로 서원산(해발 473.2m)으로 산맥이 이어지며 남동쪽으로 덕산으로 통하는 길목을 내주는 형태의 지형을 가지고 있어 예전부터 명당자리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아버지묘를 이곳에 쓰고자 가야사라는 절을 폐사시켰다는 역사적 사실과, 병인박해 때 독일인인 오페르트가 1868년 덕산 구만포에 상륙하여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발각되어 달아난 사건 때문에 대원군이 더욱 쇄국정책을 쓰게 된 원인이 되었던 근원지이기도 하다. 상가리 미륵불이 가야사 경내에 위치하다가 폐철 당시 이곳으로 옮겨졌는지, 혹..

제56편 ; 석곡리 미륵불과 석탑(예산 1)

1. 들어가며 대천천과 지곡천이 삽교천으로 합류하는 곳의 평야지대 부근에 위치한 석곡리는 야트막한 구릉으로 형성된 지형을 가진다. 옛 절터가 마을회관 동쪽 150m되는 지점이라고 하니 용고길 옆 밭 부근(석곡리 389-1)인 것 같고, 폐사의 원인이 난리 중 화마라는데, 18세기 초이면 외세의 침략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당쟁에 의한 정국혼란으로 충청, 경상, 전라도에서 일어났던 무장반란인 '이인좌의 난(1728)'에 의한 홰철로 추측할 수도 있겠다. 옮겨진 불상의 높이는 대략 높이 250cm, 몸통 넓이 100cm이고, 몸통 두께는 40~50cm이며, 얼굴의 크기는 60~70cm로 4등신 정도로 몸통에 비해 얼굴이 크다. 머리에 보관을 썻는데 윗부분이 평평한 것은 보개를 얹기위한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