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외 유적지 탐방 65

제5편 ; 나리분지의 억새 투막집(울릉2)

1, 들어가며 나리분지는 성인봉(해발 984m)을 필두로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해발 약 400m대의 평지이다. 한 개 리 단위의 마을을 형성할 수있는 자연적인 조건들이 갖춰졌다고 생각된다. 신라시대 우산국이라는 나라가 있었고, 지증왕 때(512년) 하슬라주(溟州)의 군주 이사부가 정벌하여 복속시켰다는 역사적 사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엔 어딘가 과장된 요소가 있었지 않나싶다. 울릉도에 들어서면 해안가 주변 모두가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 사람들이 살기에는 척박한 환경임을 바로 알 수있다. 농경지를 갖고 최소한의 식량을 확보할 수있는 곳이 나리분지 뿐인데, 한 국가를 경영하기엔 턱없이 모자라 인구의 확보가 어려울 것같다. 사람이 없는 정치권력은 있을 수가 없기에 우산국이라는 나라보다는 최소한 가족단위로 한, ..

제4편 ; 나리분지의 너와 투막집(울릉1)

1, 들어가며 올 여름 7월에 오랫동안 가고 싶어했던 울릉도와 독도를 다녀왔다. 나리분지를 답사하는 과정에서 투막집을 만나고는 젊은시절인 '80년대 강원도에서 건설현장을 누빌 때, 비행기재를 넘어가다보면 보이던 너와집이 생각났다. 그 당시 강원도 화전민 부락에는 볏집을 구할 수없기에 굴피나무 껍질을 벗겨 지붕의 재료로 사용하였다. 굴피나무 껍질도 몇 해 안가면 썩어서 비가 새기 때문에 수시로 새것으로 바꿔 끼워줘야만 했기에 장작을 패어 보관하는 장작더미 옆 추녀밑에는 굴피나무 껍질을 수시로 수집하여 보관하고 있었다. 정선으로 가는 터널이 뚫린지도 오래이니 비행기재를 넘나드는 일도 없을터이고, 생활의 불편함에 그 너와집도 없어졌겠지만 이따금 그 집이 생각날 때가 있다. 옛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 초 왜구들..

제3편 ; 익산 쌍릉, 대왕릉(익산3)

1, 들어가며 익산이 백제의 수도로 잠시동안 운영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에는 학자들마다 설왕설래의 이견들이 많다. 700여 년간 이어져온 백제의 마지막을 눈앞에서 지켜보았던 의자왕은 당나라에 끌려가 패망의 설움을 안고 생을 마쳤으며, 백제가 이룩해 놓았던 문화와 역사가 송두리째 잊혀지게 된다. 백제 멸망후 기록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도 13세기 말엽에 간행 되었으니 백제 패망 후 600여년이 흐른 뒤가 되어 기록한 것이니 어찌보면 요즘 인터넷으로 떠도는 이야기보다 더 신빙성이 없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왕조가 바뀌거나 전란을 당하면서 수 많은 기록물들이 사라진 현 싯점에서는 우리 영역에서 발생된 역사를 주변국이었던 중국과 일본이 기록한 사서들에서 우리의 역사를 구성하여야 하는 기이한 현상이 생기게 되고..

제2편 ; 왕궁리 5층석탑과 고도리 석조여래입상(익산2)

1, 들어가며 미륵사지 석탑을 본따서 만든 석탑이라는 왕궁리 5층석탑은 1997년에 국보로 승격된 석탑이다. 백제계의 석탑 중 백미로 일켵는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과 형식은 비슷하지만 규모면에선 훨씬 웅장하게 느껴진다. 기단석 위로 5층의 탑신이 파란 하늘과 흰구름에 어울어져 부처님의 사리를 모셨던 이 지역 민중들의 신심을 기도하며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후대인들은 바로 느낄 수 없을 것 같다. 1965년에 해체 수리하면서 1층 지붕돌 중앙과 기단에서 발굴된「금강경판」19장과 금동제 사리함, 사리병 등 사리장엄구(국보 제123호)가 발견되었다. 이들 국보급 유물들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국립익산박물관으로 이전되어 백제시대의 아름다움을 후세에 전하여 주고 있다. 역시 전래되는 유무형의 문화유산들은 그것들이 있..

제1편 ; 미륵사지와 국립익산박물관(익산1)

1, 들어가며 미륵사지는 사적 제 150호로 백제 무왕(제위기간 ; 600~641)이 사자사를 방문할 때에 큰 연못에서 미륵삼존불이 나타나자 왕비의 청에 의해 절을 세웠다고 하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있다. 익산의 평원에 우뚝 솟은 미륵산(해발 430.2m) 아래에 위치하는 미륵사지는 서쪽에 흉물스럽게 일제강점기 콘크리트로 보강하여 보존 했었던 탑을 다시 복원하여 단장을 하였다. 1980년대 본격적인 발굴조사로 동탑과 서탑 사이에 목탑을 세워 3탑 3금당의 형식을 취했던 것으로 확인 되었고, 2009년 1월 서쪽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는 미륵사와 백제 무왕과의 관계를 규명하는 사리봉영기가 발굴되어 백제시대에 익산의 중요도가 한층 높아지고, 지역민들에게는 백제의 마지막 왕도라는 확실한 자부감을 갖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