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외 유적지 탐방 65

제45편 ; 일두 고택 (함양 4)

1. 들어가며 남계서원에서 강을 건너 약 3km 떨어진 개평마을에는 중요민속문화재 제186호로 지정된 일두고택이 있다. 경남지방의 대표적인 전통한옥으로 대지 3천여 평, 12동의 건물로 일두 정여창 선생이 세상을 뜬 뒤인 1570년 후손들에 의해 사대부가의 면모를 갖추어 건축되었으며, 1843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조성되었다고 한다. 골목에서 행랑채 사이로 난 솟을대문에 들어서면 누마루가 붙어있는 사랑채가 보인다. 사랑채는 마당에서 1.2m 정도 높이에 기단을 조성하고, 누마루를 높여 통풍과 풍광을 즐길 수 있도록 조성해 놓았다. 외부인이 안채로 들어가는 것을 통제하기 위한 좁은 중문과 별채에서 외부로 나갈 수 있도록 작은 홍예문을 설치한 것이 흥미롭다. 유가(儒家)에서는 조상의 음덕을 받고자 사당과..

제44편 ; 남계서원(함양 3)

1. 들어가며 남계서원은 최치원 역사공원에서 동북 방향으로 약 10km 떨어진 수동면 원평리 586-1에 위치하며 2019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으로 등록된 9곳의 서원 중 한 곳으로 일두 정여창(一蠹 鄭汝昌, 1450~1504)의 학문과 행적을 기리기 위한 서원이다. 서원은 16~17세기 조선 시대 지방 교육의 요람으로 성리학적 가치관을 확립하고, 문묘 종사의 제향을 봉행함으로써 학파의 결집을 도모하였던 사립형태의 교육기관이었다. 이곳의 건축양식은 남서향으로 남강(남계, 蘫溪)과 들판을 바라보며 나직한 언덕 위로 정문인 풍영루를 거쳐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를 배치하고, 한 단 높은 곳에 유생들이 공부하던 강당인 명성당이 자리하며, 그 뒤 경사지에 사당을 배치한 전학후묘(全學後廟..

제43편 ; 최치원 역사공원(함양 2)

1. 들어가며 오전 상림원 답사를 마친 후 오후에 최치원 역사공원으로 발길을 하였다. 역사공원은 천년의 숲 상림공원과 연계하여 함양군이 2018년 4월에 준공하였고 함양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선생의 덕과 학문, 애민정신을 기리고자 조성하였다고 한다. 입구에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좌측으로 선생의 일대기를 벽면에 빼곡하게 구성해 놓은 역사관이 있으며, 우측으로 상림원의 조성역사 흐름에 대하여 전시한 상림관을 배치하여 이야기가 살아 숨 쉬는 문화의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계단 위쪽으로 정문인 외삼문이 축조되었으며 안으로 들어서면 중앙에 배치된 고운 기념관에 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데, 대체로 근래에 축조된 건물이고 단청이 없어 고색창연한 미는 찾아볼 수 없지만, 그 지역만의 역사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

제42편 ; 상림원 최치원 신도비(함양 1)

1. 들어가며 함양 산삼 축제(9.7~9.12)는 그 기원을 신라시대 최치원이 중국 당나라와 왕래하면서 산삼을 무역 거래품목으로 하던 것을 기원으로 삼고 고운 선생을 산삼의 신으로 추앙하고 있다고 한다. 축제장을 벗어나 상림원에 위치한 ‘문창후최선생신도비(文昌候崔先生神道碑)'를 답사하였다. 이 비는 1923년에 세운 것으로, 신라 진성여왕 때 천령군(현 함양군) 태수로 부임한 고운 최치원이 지리산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위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제방을 쌓고, 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하여 홍수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하였다는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신도비 옆으로 근래에 세운듯한 사운정(思雲亭)이란 정자가 고운 선생을 사모하는 함양군민의 마음이 되어 시원한 그늘을 제공한다. 불타는 듯한 꽃무릇의 만개가 산..

제41편 ; 대청도 둘러보기(대청 5)

1. 들어가며 대청도는 백령도에 비해 농경지가 적고 척박하여 살기가 고단한 세월을 감내했을 것 같다. 섬을 둘러보면서 본 논은 불과 몇 마지기 되지 않고, 밭뙈기들도 농가 주변으로 좁게 형성되어 있을 뿐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섬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바다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청도에는 아직도 당집과 같은 무속신앙이 존재함이 어업활동의 불안함을 신앙으로 이겨내려 하는 믿음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백령도와 대청도는 지리적으로 가깝지만, 두 섬 주민들 간의 긍지와 자부심은 서로 경쟁적인 인식이 배어있는 것 같은 말투가 자연적으로 스며 나옴을 대화속에 나타나기도 한다. 관광지로서 기반시설이 부족하여 불편한 것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래도 편리함 보다는 불편함이 존재하는 여행이 추억에 오래 남..

제40편 ; 서풍받이와 광난두해변(대청 4)

1. 들어가며 대청도 둘레길 제8코스인 서풍받이길은 광난두 정자를 출발하여 마당바위까지 왕복 두시간 반 가량 걸린다. 이곳에서도 문화관광 해설사의 안내를 도움받을 수 있다. 광난두 정자는 이 섬의 최고봉인 삼각산(해발 343m) 등산로의 분기점이며 반대편 서풍받이 둘레길의 출발점이 된다. 정자 바로 밑에 서쪽 바다를 바라보며 누워있는 초묘가 두 기가 있다. 한국전쟁 후 이곳을 해병대가 들어와 국토를 지키는데, 초창기에는 물자의 조달과 보급이 형편없어 고생이 많았다고 한다. 부대 앞에서 작은 점포를 꾸려 생계를 유지하던 할머니는 장병들의 옷가지들을 꼬매주고 자식처럼 돌보았다고 한다. 그 고마움에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해병대 장병들은 직접 이곳에 장례를 치러 드렸다고 한다. 초입 전망대에서 까마득히 내려다 보..

제39편 ; 모래울 해변(대청 3)

1. 들어가며 '모래울'이란 지명이 정겹다. 섬 지역의 지명에서 우리의 옛 말들의 흔적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는데, 모래울이란 지명은 아마 '모래(沙)+울(墻, 丘)' 정도로 풀이 될 듯 한데, '모래로 둘러쳐진 담장' 또는 '모래로 된 언덕(沙丘)'이란 뜻일게다. 모래울 해변은 대청도의 서쪽에 면한 바닷가로 서풍에 의한 파도와 바람에 의해 바닷속에 있던 모래들이 해안으로 밀려와 거대한 언덕을 형성하였고, 뒷편으로는 바람을 막아주는 언덕 때문에 일찍이 마을이 형성될 수가 있었다. 그 언덕에서 자라는 적송들도 아마 사구의 모래바람을 막고자 하는 섬주민들에 의해 방풍림으로 조성된 듯 한데, 세월이 지나 유전자 보호 수림으로 보호를 받고 있다. 적송은 울진 지역의 곧바르게 자란 나무가 아니라 해풍에 의해 이리..

제38편 ; 농여해변(대청 2)

1. 들어가며 대청도는 해변의 섬이라고 불린다는데, 그 명성답게 질 좋은 해변이 널려 있다. 그중 농여해변은 발자국조차 남기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며, 바닷물이 빠지면 풀등이 나타나 마치 잔잔한 호수처럼 맑은 해수욕장이 된다. 거기에다가 지질학적으로 희귀한 지질명소인 나이테 바위가 농여해변 내에 위치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는다. 농여해변의 암석은 지층이 퇴적되어 고압에 의한 열과 지각의 운동으로 뒤틀리는 습곡작용을 받아 90도로 세워지면서 오랜 시간에 걸쳐 풍화와 침식작용을 거쳐 오늘날의 고목나무의 나이테처럼 보이게 되었다. 파도는 해변의 모래를 깎아내어 바닷속으로 끌어들이는 작용도 하지만, 역으로 바닷속의 모래를 해변으로 이동시키는 작용도 한다. 농여해변의 파도는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의하여 바닷속..

제37편 ; 옥죽동 해안사구(대청 1)

1. 들어가며 예전에 여객선을 타고 백령도로 들어려면 먼저 대청도에 들리게 되는데, 여객선에서 대청도를 바라보면 눈에 먼저 들어오는 곳이 새하얀 모래 언덕과 농여해변의 풀등이었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산자락을 덮고 있었던 모래 언덕이 보이지 않아 궁금하게 생각했는데 현장을 와보고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대청도는 백령도와는 달리 평야지대가 없고, 높은 산(삼각산, 해발 343m)이 사방으로 골짜기를 내주고 둘러처져 있어 도로가 험하다. 현재 1,000여 세대로 인구 1,500명을 밑돌고 있는데 대부분 어업에 종사를 하고 있다. '대청도는 고려 충혜왕 1년에 원나라 마지막 황제인 순제가 11세 태자 시절에 600여명의 식솔을 거느리고 옥지포(현 옥죽동)로 유배되어 현재 대청초등학교 자리에 궁궐을 짓고..

제36편 ; 백령면 둘러보기(백령 7)

1. 들어가기 30년 전 서너달을 생활했던 백령도의 추억을 불과 1박 2일이란 짧은 일정으로 회상한다는 것이 가당치도 않은 일이겠지만 주마간산을 하듯 바쁘게 돌아 다녔다. 그땐 먹고살기 위해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 와서 객지생활 하느라 보이지 않았던 모습들이 인생의 석양이 뉘엇해지는 지금은 보이는 것들이 있다. 어쩌면 내 젊었던 시절에 남겨 놓았던 발자취에 지금의 발자욱을 얹어 놓았는지 모르겠다. 또 오늘의 발자욱에 미래 어느땐가 다시 이곳을 찾아와 허리굽은 노인네의 발자국이 합쳐지길 바라는 것이 욕심일까? 백령면민 만큼이나 많은 군인들이 상주하고, 매일 여객선이 천여 명의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데도 진촌리 면소재지의 밤길이 어둑한 것을 보니 관광지로써 활발한 상권이 제대로 조성되지 않음을 알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