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시

항복문서

푸른나귀 2016. 8. 3. 14:03




구름 한 점 없는 오뉴월 땡볕 아래

긴 고랑 쪼그리고 앉아 풀 매시던 울 엄니

그놈의 잡초는 매고 돌아서면 다시 난다고

들녘으로 불어 오는 실바람에

푸념섞인 넋두리를 날려 보내더니만 


흰 책상머리에서 돌아와 그 고랑에

호미들고 풀과의 전쟁을 벌이는 아들 내외

그놈의 잡초 제초제라도 뿌려야 박멸되지 않을까

들녘으로 흘러가는 구름 그림자에

땀 식히며 어미가 했던 푸념을 늘어 놓는다.


호미 끝으로 딸려오는 잡초의 무성한 뿌리 수염이

밭고랑의 흙을 걸하게 만들고

줄기차게 뻗어가는 줄기와 이파리의 무성함이

지렁이가 살 수 있게 그늘을 만들어 주어

콩과 들깨와 생존의 경쟁으로 더욱 풍성하게 해줄터인데도


고향에 돌아온 얼치기 농부가

게으르다는 소릴 듣지 않기 위한 허세와

좁은 땅에 한 톨이라도 더 많이 수확하여

가족과 친척들과 동무들과 나누기 위한 명분에

내 식탁에 농약 뭍인 먹거리를 올릴 수 없다는

강박 관념에 휩싸여 풀과의 전쟁을 치룬다.


신석기시대 농경이 시작된 이후로

사람들은 잡초를 지긋지긋한 존재로 삼았다

오로지 주식이 될 수있는 작물만이 善이었다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는

아직 잡초에게 야생초라고 명명할 수 없을거다.


한참후에나

내 늙어 호미자루 손에 들지 못 할 때

이 밭두렁을 찾는 이  없을 때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가는 잡초에게

게으른 농부가 이 들판의 모든 권한을 양도할 것이다.

항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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