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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3편 ; 청라 함열남궁씨 시조묘

1. 들어가며    '60년대 이 마을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며 천방지축 뛰어놀았던 공간 중에 이곳도 한 부분이었다. 오래된 소나무 숲 앞에 펼쳐진 묘 앞 잔디밭은 뛰놀기에 적당했으며 석물들에 올라타 무동을 타는 것 또한 시간가는 줄 모르는 놀이였다.  봄인지 가을인지 어느 시기엔 흰옷을 입은 어른들이 묘 앞 상석에 갖은 제물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고 옆집에서 잔치를 벌이면 동네 아이들에게도 떡과 과일, 사탕 등을 나눠주었다. 한 갑자 지나서 위성지도로 그곳을 살펴보니, 묘 앞 잔디밭에 둥근 타원형의 트랙이 보이기에 무엇일까 궁금하여 찾아가 보았다. 장변 20m, 단변 15m 원형으로 중앙부에 낡은 의자가 있고, 사람인지 동물인지가 트랙을 돌아다녔는지 잔디가 누워있는데 경마의 흔적은 아닌듯 하다.  현장을 ..

제182편 ; 보령지역 묘지석 문인상(文人像)

1. 들어가며    웅천의 미륵모퉁이를 규명하기 위해 내포지역의 미륵불을 조사하여 답사를 마치고, 미륵모퉁이가 장승이나 문인석으로 볼 수는 없는지 비교하고자 보령지역에 산재한 묘지석들을 답사하였다.  묘지의 석물에는 고석(鼓石; 상석을 받치는 돌), 곡장(曲墻; 봉분 뒤의 담장), 난간석( 봉분 주위 울타리), 망주석(망두석; 묘의 좌우에 배치하는 기둥), 병풍석(호석; 묘지 둘레를 에워싸는 돌), 상석(床石; 봉분 앞에 설치하는 상모양의 돌), 장명등(석등; 일정 품계이상의 묘에 설치하는 등), 향로석(향로와 향합을 올려놓는 돌), 석마,석양, 석호(무덤 앞에 조각한 말, 양, 호랑이 석상)이 품계에 따라 설치되며,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武人石)은 봉분을 지키는 파수꾼의 역활을 한다. 무인석은 대체..

제181편 ; 청라 사내사(舍乃寺) 흔적 답사

1. 들어가며    보령문화연구회에서 2024년 4월 27일(토)에 백월산 아래에 위치 하였다는 사내사(舍乃寺) 추정지를 답사하였다.  1715년 충청수영성 자료에 의하면 충청수영의 속사(屬寺)로 청양의 장곡사(長谷寺), 임천의 보광사(普光寺), 한산의 고석사(孤石寺), 보령 오서산의 성당사(聖堂寺),  백월산의 사내사(舍乃寺), 남포의 영흥사(永興寺)로 기록되어 있다.  보령문화연구회에서 2022년 11월 사내사 사지 1차 답사를 하였으나 지표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이번 답사로 사지로 비정되길 바라는 바였다.   새내라는 지명은 라원리의 동북쪽, 즉 백월산의 서남쪽으로 펼쳐진 완만한 능선의 깊고 평편한 경사지이다. 전면으로 성주산 장군봉이 바라다 보이고, 멀리 청천 저수지까지 넓은 전망이 보이는 곳으로..

제180편 ; 주산 주렴산 3.1만세운동 추모 기념식

1. 들어가며     일제가 이 땅을 강점했던 초기에 3.1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불타올랐다. 보령시에서는 당시 주산면 증산리 출신으로 배재고등학교에 다니던 이종연(추후 이철원으로 개명)이 고향으로 돌아와 동지들과 규합을 하여 주산 장날인 4월 16일 거국적으로 만세운동을 하려고 기획하였으나, 사전에 기밀이 누설되어 다음날 주렴산의 국수봉에 올라 태극기를 꽂고 횃불을 밝히며 징을 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그 후 만세운동을 행했던 애국지사들은 왜경의 혹독한 고문과 태형을 받았으며, 그 영향으로 일찍 세상을 뜨기도 하였으며, 해외로 망명길을 떠나기도 하였다. 1985년 주렴산 꼭대기에 비를 세우고 주산면민들이 기념식을 거행해 왔으며, 1999년부터 보령시 주관으로 기념식을 거행해 왔다. 또한 2000년..

제65편 ; 내덕리 석불미륵입상(홍성 5)

1. 들어가며 홍성 종합터미널에서 약 3.4km 떨어진 어경마을회관 건너편 야트막한 구릉 대나무 숲 앞에 미륵불이 모셔저 있다. 전설에 의하면, 아주 먼 옛날 힘이 장사인 한 장군이 어깨에 미륵불을 모시고 가야산에서 대흥산으로 모시고 가던 중 이곳에 떨구었다고 한다. 그 장군은 이곳이 미륵이 점지한 정토임을 인지하고 터를 마련하였다고 한다. 이 미륵에게 정성을 다하여 자식을 점지하였다는 이동네 이장님의 구술을 들었으며, 음력 2월 초하루 지자체의 지원을 받아 마을제를 지내고 있다고 하였다. 이장님의 걱정은 미륵불과 주변의 관리에 대하여 많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주춧돌 위로 기둥을 세워 초가로 누각을 만들어 비에 의한 풍화를 막았었는데, 누각이 없어진 지금은 전에 비하여 급속도로 풍화가 진행되고..

제64편 ; 대교리 석불입상(홍성 4)

1. 들어가며 대교리 석불입상을 찾아가며 또 혼란을 겪었다. 현장 안내판의 주소가 '대교리 408번지' 또는 '의사로 63번길 9'로 적혀있어 홍성천의 하천부지 주차장을 가리킨다. 미륵불은 동네 어린이공원 한켠에 남향으로 세워져 있는데, 노출 높이가 3.3m이고, 어깨폭이 0.9m이며 몸통두께가 0.4m이다. 머리의 높이가 1.0m로 지상부에 돌출 된 것으로는 3등신에 해당한다. 연약질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조각하기 쉬운 잇점이 있겠지만 풍화가 지속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을 터인데도 동 시대의 작품으로 보아선 상태가 좋은편이었다. 아마 땅속에 오랫동안 뭍혀있다가 농부에게 발견이 되어 다시 햇빛을 보게 된 덕일 것이다. 전체적인 균형미가 무시되고, 자비에 찬 눈웃음이 부족하지만 그 시대를 살아가던 민초들의 ..

제63편 ; 덕산 신평리 미륵돌(예산 8)

1. 들어가며 덕산면사무소에서 윤봉길의사 기년관 쪽으로 약 1.8km 정도 가면 버스 정류장이 나온다. 그 옆 건물 앞 도로변에 신평리 미륵돌이 세워져 있다. 한 평 남짓 스텐 난간대로 보호를 받고 있는 미륵불은 비스듬하게 세워져 있는데, 도로변 보다 지대가 낮게 되어 있다. 아마 도로가 넓혀지며 기존 지대보다 높아진 탓에 땅속으로 들어간 현재의 모습이 된 것 같다. 읍내리 미륵불과 흡사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측면과 후면의 조각을 생략하고 불상의 손 위치가 같다. 불상의 높이는 매립부분을 제외하고 2.5m에 달하고 어깨 폭이 0.9m, 몸통 두께가 0.4m이며 보개는 0.9*0.5*0.3m가 된다. 얼굴 길이가 1.2m로 몸체의 절반에 해당하는 2등신불로 보이는데 아마 무릎 아래로 매립된 부..

제62편 ; 덕산 읍내리 미륵불(예산 7)

1. 들어가며 덕산면 읍내 사거리에서 송산교차로 쪽으로 약 200m 정도 가면 우측의 하이카프라자 건물이 있는데, 옆 건물과의 담장 사이에 숨어있듯 한 미륵을 만날 수 있다. 마치 달걀처럼 둥그스름한 껍데기 속에 들어있는 듯한 모습의 입상인데, 화강석의 통돌을 전면부만 다듬은 부조형식을 띤 미륵불이다. 하부가 일부 땅에 묻힌 것으로 보이는데, 지상부의 높이가 2.2m이고, 어깨폭 0.8m, 몸통 두께 0.4m, 얼굴 길이 0.7m이고, 관모 상부의 보개는 0.8*0.7*0.1로 상부에 갓모양이 돌출되어 있다. 지표면 위로 나타난 크기로는 3등신으로 보이는데, 아마 땅속에 묻힌 하부를 생각하면 4등신불이 될 것 같다. 얼굴의 형상은 토속적인 냄새가 물씬나며,관모의 형태가 비교적 낮고 위에 보개돌이 얹어 있..

제61편 ; 대흥 동서리 미륵불(예산 6)

1. 들어가며 아침부터 봄비가 주적거리며 내리기에 밭일을 멈추고, 미루었던 내포지역 2차 미륵불 답사를 진행하였다. 화성에서 619번 지방도를 따라 23km 정도가면 예당 저수지를 끼고 좌측의 도로변에 위치한다. 나무 홴스 안에 서 있는 이 미륵불은 마을에서는 망태할아버지로 불리우고 있으며, 매년 음력 2월 초하룻날 마을의 안녕을 위해 제를 지낸다고 한다. 미륵은 전면의 저수지를 향해 동향으로 서 있는데, 원래 송림사라는 유적에서 일제시대에 대흥면사무소로 옮겨지고, 그후 대흥초등학교 교정으로 다시 옮겨진 후, 일제말기 지금의 자리로 옮겼으나 근래 도로확장으로 조금 뒤로 물러선 현재의 위치로 수없이 옮겨짐을 당해야 했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풍화가 많이 진행되어 불상인지, 문인석인지 잘 구별이 가지 않지만 ..

제179편 ; 내현리 우천선생 사은비

◎ 우천 노정우(又川 盧貞愚)선생 사은비 청라면사무소에서 청소 쪽으로 난 609번 지방도를 따라 1.0km 쯤 가다보면 우측으로 안골동네가 보인다. 원래 이곳은 교하노씨의 집성촌으로 근래까지도 타성씨는 들어가 살 수 없을 정도로 엄격한 보수적인 동네였다. 동네의 맨 윗쪽에는 그 집안의 종손이 사는 집이 있는데 그곳의 사랑채가 예전에 한학을 가르치는 서당이 있었다.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각 고을의 젊은이들이 사서삼경의 한문학을 배우기 위해 서당을 찾았으며, 우리 어릴적에 보아온 모습은 갓쓰고 회초리 들고 근엄하게 앉아있는 훈장님과 그 앞에 무릎 꿇고 머리를 흔들며 큰소리로 글읽던 학동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된다. 훈장님 사후에 제자들에 의해 세워진 이 사은비는 청고을에서 특이하게 한학자 스승을 기리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