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172편 ; 무염국사 공부길 따라 떠나는 답사(2. 낙양 용문석굴과 향산사)

푸른나귀 2023. 10. 21. 18:17

1. 들어가며

 

     도도히 흐르는 이허(伊河)의 물줄기는 천년의 세월을 어제와 오늘로 이어주는데, 정을 쪼으던 장인들과 석굴 속에서 밤낮 없이 진리를 구하던 구도자들, 그리고 축원을 위해 몰려들던 민중들의 기원이 모두 이루워졌을까?

 이허의 강물을 사이에 두고 서쪽의 용문산 기슭과 동쪽의 향산 기슭에 위진남북조에서부터 당나라에 걸쳐 암벽에 석굴 사원을 조성하는 사업을 국가적으로 크게 지원을 하였다고 한다. 북위의 효문제가 낙양으로 도읍을 정한 이후(493년)부터 조성된 이곳의 석굴은 무려 2300여 개, 불상은 10만여 개에 달한다. 석굴은 북위 시절에 3분의 1 가량이 설치되고 나머지 대부분은 당나라 시절에 조성되었다고 하는데, 최근에 어느 학자에 의해 신라인이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석굴 '신라상감(新羅像龕)'을 찾았다고 한다. 늦은 시간이라 답사하지 못하여 아쉽기만 하였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백제인이 조성한 석굴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만큼 많은 한반도인들이 이곳에 들렀음을 알 수 있겠다.

 광활한 중국대륙의 중원은 자원이 풍부하여 이민족들에 의한 침탈의 중심지였는데, 그 중원은 모든 문화를 받아들여 녹여내는 용광로였다. 한반도를 경영하던 백제와 신라, 그리고 통일신라, 만주벌판을 경영하던 고구려와 발해의 많은 지식인들이 이땅을 찾아와 법을 구하고, 부를 축척하며 많은 문물과 문명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어떤이는 백제의 22담로로 중국대륙의 일부를 경영하였다고 하고, 어떤이는 산동반도가 고구려의 유민자들에 의해 경영(이정기의 제나라, 782)되었다고 하고, 어떤이는 장보고 등 통일신라인에 의해 신라방, 신라원 등으로 중국 동부를 운영하였다고 하기도 한다. 그만큼 한반도와 중국대륙은 순치와 같은 애욕의 관계로 이어졌을 것이다.

 

 무염국사가 지상사에서 화엄을 다시 공부하면서 이미 본국에서 화엄을 공부한 탓에 실망을 안고 불광여만(彿光如滿)을 찾아와 본격적인 선을 수행한 곳이 향산사(香山寺)였다. 여만을 찾은 무염은 열심히 공부를 하였고, 여만은 '중국에서 선이 그치면 동이에서 그 맥을 찾아야 할 것이다.'라며 제자에게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향산사는 이하가 굽어보이는 향산의 중턱에 위치하여 풍광이 아름다운데, 소림사에 기거하던 달마대사를 찾아와 몇 날이나 제자 되기를 간청하였지만 허락하지 않자 왼팔을 잘라 하얀 눈밭이 붉은색으로 변하게 하는 기적을 일으켜 제자가 된 혜가(慧可)대사가 신광이라는 법명으로 출가한 이야기가 전해지며,측천무후가 낙양에서 황제로 등극하여 이곳을 자주 찾아와 군신들에게 시를 짓게 한 이야기도 전해진다.

 백거이(白居易, 772~846)가 829년에 낙양에서 이곳으로 옮겨 살다가 퇴락한 향산사를 중건하여 친구인 여만선사(如滿禪師)를 주지가 되도록 돕고, 여생을 이곳에서 시를 지으며 유유자적한 문필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무염국사가 822년에 입당을 하여 845년 당 무종의 폐불정책(회창의 법난)으로 승려들을 본국으로 추방할 때까지의 활동무대의 중심지가 향산사가 아닌가 생각된다. 22세의 젊은 나이에 입당을 하여 45세 중년의 나이가 되도록 중국대륙을 순회하였을 것이니 낭혜화상비에 기록되지 않은 일대기가 얼마나 많을 것인가? 용문석굴의 어느 한 곳에서 면벽수행을 하였을 것이고, 가까이 달마대사가 기거하며 선종을 발원한 소림사에 들러 법도를 구하려 하였을 것이며, 곳곳의 명산을 찾아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무염국사가 달마대사의 계통을 이어 여만선사로부터 수행을 한 향산사는 늦은 시각 때문에 답사하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무염국사의 발자취 흔적만 엿보고 지나치는 아쉬움만 남기고 말았다.  (보령문화 제28집, 보령문화연구회, 2019, 279~322쪽, 성주사 무염국사의 구법행로 답사(신재완) 참조) 

 

 

   @ 세계문화유산 용문석굴(龍門石窟) 입구에 세워진 조형물

   @ 용문석굴에 들어서며 차량의 창문을 통해 바라본 봉선사의 불상

   @ 강변을 따라 절벽에 설치된 각종 규모의 석굴과 몰려든 관광 인파

   @ 석양이 저무는 저녁나절 관광객들의 줄은 끊어질줄 모르고 밀려든다.

    @ 큰 절벽의 바위를 정으로 쪼아 불상을 만들고 신심을 불어넣은 대륙의 불심이 대단하다.

   @ 비록 석실 내의 불상은 없어졌지만 석실 밖 부조된 탑과 보살 등으로 당나라 시대의 믿음을 엿볼 수 있다.

   @ 보수공사가 한창인 이곳 어느 부분에 백제인이 설치하고 기도한 석굴이 있다는 가이드의 말에 솔깃하였다.

   @ 석양이 지자 탐방로 주변으로 불 밝혀지고 구도의 행렬처럼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 중국의 유일한 여황제인 측천무후를 형상화한 불상. 여성스럽게 부드러운 곡선의 조화로 지그시 내려보는 눈썰미가 예사롭지 않다.

   @ 당나라 시대 황제의 권위가 백성들을 제압하려는 듯 부처의 뒤에 숨어 있는 압제가 느껴지기도 한다. 

   @ 이허(伊河) 강에 비친 석굴의 불야성이 당나라 석공들의 돌다듬는 정 소리를 싣고 흐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 강 건너 향림사의 전경. 아쉽게도 늦은 시간이라 들르지 못하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