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177편 ; 대천 산신당 산신제(2)

푸른나귀 2024. 2. 23. 18:23

1. 들어가며

 

   작년 이맘때쯤 산신제가 열리는 이곳을 찾았지만 제를 지내는 모습을 직접 참관하지 못하여 아쉬움이 남겨있었다.

 마침 정월 보름 전날인 오늘 오후 3시에 산신제를 지낸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와 보았다. 작년에 공사 중이었던 봉재터널이 개통되어 지장골 사람들이 시내로 진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주는 것 같았다. 차량을 마을 골목에 세워두고 걸어서 산신당으로 향하는 길엔 겨울 끝을, 봄의 시작을 알리는 듯 새싹들이 움트는 것이 보인다.

 미리 제당에 올라와 젯상을 진설하는 아저씨(노재설씨)를 도와주면서 제당 안을 살펴보니, 모시고 있는 산신의 신주인 탱화가 모사된 사진이어서 약간은 실망이 되었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산신당의 신주가 민속화도, 불화도 아님은 격에 떨어지는 듯한 감이 몰려온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산신제의 명맥을 이어가는데 위안을 삼아야할 것 같아 정성을 다한다.

 제를 주관하는 마을 주민들과 관할 자치단체장들이 제례복으로 환복하고 제를 지내는 의식과 순서는 유교식으로 행하여진다.

 초헌관을 비롯한 아헌, 종헌관의 제향을 마치고, 각자의 소원을 비는 소지에 불을 붙이는 것으로 제향을 끝낸다. 제물에는 소머리를 사용하고 백설기와 포, 나물류, 과일류, 견과류 등이 진설되었다.

 산신제를 진행하는 마을주민들은 지자체의 지원을 받아 행사비용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예전에는 풍물패도 제를 지내는데 참여를 하였다고하나 풍물을 하는 사람도 없어지고, 풍물패를 참여시키는 데에는 많은 비용이 들기때문에 언젠가부터 간략하게 명맥을 유지한다고 한다.

 지역민의 안녕을 위하던 산신제가 농업을 주업으로 하던 시대를 벗어나니 위축될 수밖에 없지만, 이런 간소화된 정월 보름의 전통도 언젠가는 끊어질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려옴을 느끼게 한다.

 그나마 산신제를 지내는 모습을 이제라도 볼 수 있었음을 고맙게 생각하며 제당을 빠져나왔다. 

 

 대천의 산신당은 조선말 갑오년(1894년)경에 이지역에 큰 역병이 발생하였는데, 주변주민들이 합심하여 역병을 물리치고 주민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산신당이 세워졌다고 전해진다. 

 

 

2. 참고자료

 

   @ 산신당 위치 ; 보령시 대천동 138-107 (봉재터널 입구 오른쪽 산능성이)

   @ 보령의 흔적따라 제 167편 ; 대천 산신당(1) 참조

 

   @ 산신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대천시내와 지장골을 잇는 봉재터널이 완공되어 통행되고 있다.

   @ 산신당의 내부 모습

   @ 신신당 북쪽벽에 모셔진 신위로 산신의 탱화 사진이 걸려있다.

   @ 산신당 중수시에 성금을 낸 명단이 우측으로 중수기와 함께 걸려있다.

   @ 1996년도 산신당을 중수하며 기록한 중수기(重修記)

   @ 산신당에 차려진 제물에는 소머리가 쓰인다.

   @ 대천1,2동 지역주민들 중심으로 산신제를 지내는 모습 

   @ 제향을 마치고 각자의 소원을 빌며 소지를 태운다.

   @ 전보령향교전교 이봉규님이 쓴 축문을 노재술님이 읽었다.

   @ 산신당 앞에 걸려있는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농기.

   @ 2기의 농기는 무오년(1978년)에 제작한 신시대동회의 것과 무인년(1998년) 대천1,2동 대동계가 제작한 것이 걸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