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176편 ; 화산리 상엿집

푸른나귀 2024. 2. 6. 11:05

1. 들어가며

 

     평생을 고닮프게 살아왔던 인생도 이승을 떠날 때에는 곱게 단장을 해서 보내는 것이 우리네 관습이었다.

 '60년대 말까지만 해도 동네 어귀 으슥한 곳에는 돌담에 초가 이엉을 얹은 상엿집이 흔하게 있었는데, '70년대 초 새마을 운동이 전국으로 펼쳐지면서 시멘트블록 벽에 함석지붕의 상엿집으로 바뀌게 된다. 세기가 바뀌면서 그것도 꽃상여라는 농협를 통해 간편한 형식으로 바뀌더니, 이젠 매장문화도 화장를 주로하게 되어 상여를 볼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사라졌다.

 농촌의 젊은층이 사라지자 상여를 멜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큰 이유 중 하나일게다.

 '북망산천이 멀다더니 / 이제 가면 언제 오나 / 오는 날이나 알려주오 / 청사초롱 불 밝혀라 / 잊었던 낭군이 다시 온다./ 어허야 어혀 어이야 어여~/  요령잽이(선소리꾼)의 구슬픈 소리가 상주들의 눈물을 쏙 빼기도 하고, 힘들게 운구를 운반하는 상여꾼들에게 힘을 복돋아 주기도 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와서 상엿집을 보고자 하였는데, 물어물어 가는 곳마다 덤불 속에 주저앉은 썩은 함석지붕만 보아왔다. 그저 내 기억 속에 살아있는 상엿집이려니 하였는데 아주 우연히 화현마을 상엿집을 보게 되었다. 길이 6.0m, 너비 1.6m의 장방형 평면에 처마높이 1.4m, 지붕높이 1.8m의 시멘트블록조에 박공식 함석지붕으로 되어있다.

 상여가 언제까지 쓰였는지 모르겠지만, 상여의 중추적인 보개(가마 뚜껑)가 보이지 않고, 차일(遮日)이라 부르는 양장과 매듭, 천들이 보이지 않는다. 보개 위에 얹어지는 꼭두도 상자 속에 있는지 확인하지 못하였다. 상여 앞에 혼백을 모시는 작은 가마인 요여(腰輿)도 보이질 않는다. 

 

 어찌보면 한반도에 사람이 살면서 장례문화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을 터이고, 상여를 매던 관습은 최소한 유학이 이 땅에 흘러들어 온 신라 말부터 계산을 해도 천 년 세월 동안 이어졌을 터인데, 그 전통이 불과 2~30년 만에 완전히 사라지니 아쉬울 뿐이다.  아울러 비록 사라지는 전통이지만 남아 있는 유물들은 그 지역의 자산이니 잘 보호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 참고자료

    @ '바람따라 가는길'님의 블로그에서 캡쳐하여 참조합니다.

   @ 마을 어귀 산모퉁이에 위치한 상여집 전면에는 상부에 습기제게를 위한 통기 구멍을 설치 하였다.

   @ 상엿집 뒤편. 시멘트블럭 벽에 외부는 미장 마감하고, 박공지붕에 함석을 덮어 쒸웠다.

 

   @ 상엿집 입구는 관리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지 허술하게 보인다.

   @ 상엿집 우측 지붕함석도 바람에 벗겨졌는지 서까래가 다 보인다.

   @ 1971년 4월 19일 상엿집을 새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벽에 남아 있다.

   @ 내부엔 상여의 장강틀과 상여 부속품을 담아 놓은 나무괘짝이 남아있다. 선소리꾼이 쓰던 요령이 보인다.

  @ 상여의 기본 구조를 받치는 장강틀의 모습이 통나무를 깎아 만든 옛모습이다.

   @ 상여의 부속품 보관 상자

   @ 장강틀의 장강과 단강

   @ 용머리 문양의 판재 부속품

   @ 난간대와 부속품들

   @ 부속품 상자의 내부에 난간대도 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