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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의 산(제19편 ; 성주산 왕자봉)

1. 들어가며 성주산은 보령지역의 동북에서 남서쪽으로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긴 산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 산줄기는 성태산에서 문봉산, 성주산 장군봉, 성주산 왕자봉(해발 510.5m), 옥마산, 봉화산, 잔미산을 아우르며 통괄하여 성주산이라고 이른다. 산행인들에게는 금북정맥의 일주 코스로 청라의 스므티 고개에서 백월산을 포함하여 성태산으로 연결하고 성주지맥을 연결하여 웅천의 화락산까지 산행을 몇 구간으로 나누어 하기도 한다. 나도 젊었을적의 호기로 성주터널에서 부터 장군봉까지 산행을 하려다 미수에 그친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등산로도 제대로 정비가 되지 않기도 하였지만 워낙 긴 코스였기에 미치지 못한 것이다. 이제는 꼭 산행을 돌파식으로 할 것이 없기에 서너시간 즐기는 것으로 만족을 한다. 봄날에 잦은 ..

보령의 산 2021.05.01

보령의 산 (제18편 ; 성주산 장군봉과 문봉산)

1. 들어가며 성주산(해발 680m)은 보령의 주요 명산이다. 성주산은 신라시대 문성왕으로 부터 숭엄산(崇嚴山)으로 직접 산이름을 하사 받았으나, 성주사가 있는 산이라 하여, 혹은 성스런 주인 무염스님이 기거하는 산이라 하여 성주산으로 불리게 된 역사속의 명산이다. 나이가 조금 들고는 일년에 한두 번 성주산에 들렸으니 개략 잡아도 한 스므번은 장군봉에 올랐을 것 같다. 그만큼 장군봉에 올라 넓게 펼쳐진 고을과 골짜기를 바라보며 숨을 크게 들이키면 내 안방과도 같은 포근함을 느끼게 하여 자주 찾게 되었다. 봄날 사나흘간 밭에서 쇠스랑질을 하다 보니 온몸이 찌브드하여 베낭을 들쳐메고 집을 나섰다. 성주산을 오르는 등산로로는 청라 의평리에서, 은선동 골짜기에서, 그리고 월티저수지에서 늦은목고개로 오르는 방법과..

보령의 산 2021.04.21

보령의 산(제17편 ; 대정산과 안산)

1. 들어가며 대정산(해발259m)은 청라의 장현리와 화성의 화암리에 걸쳐 군계를 이루고 있으며, 다락골 성지의 뒷산이 된다. 이 등산로는 백월산과 오서산을 잇는 금북정맥 11구간을 산행하는 등산인의 발자취로 제법 등산로가 뚜렷하다. 아쉬운 점은 청양쪽에서는 금북정맥의 등산로에 이정표 팻말을 세워 놓았지만, 보령쪽에 들어서는 구간에는 이정표가 제대로 설치되어 있지 않아 등산객이 매어놓은 띠지를 잘 따라가야 한다. 귀학송 버스정류장(위현)에 차를 세우고 금정도의 용곡역과 보령의 청연역을 파발마로 달렸던 길을 걸어서 우수고개에 올랐다. 보령쪽의 도로는 2차선 아스팔트길이만 청양쪽은 아직도 콘크리트 포장의 1차선으로 좁아진다. 얼마전에는 없었던 도로옆 측량표시의 빨간 깃발이 여기저기 꽂혀 있는 것이 아마 곧 ..

보령의 산 2021.04.16

보령의 산(제16편 ; 태봉산)

1. 들어가며 태봉산(해발 240m)는 오천면과 주교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서해안 고속도로를 따라 동북에서 남서쪽으로 흐르며, 오서산 줄기가 진당산과 배재산을 거치면서 건너뛰어 태봉산이 솟아 오르고 석산과 봉대산을 거친다. 그 맥은 고정리에서 서해바다로 빠져드는 형국의 지세를 가지고 있다. 태봉산은 연지리 뒷산에 속하지만 봉당2리의 영천소류지로 부터 시작되는 등산로를 택하여 오르기로 하였다. 오천 갈현리의 구수골로 넘어가는 고갯길로 접어드니 보랏빛 으름꽃이 나를 반긴다. 태봉산의 등산로는 2007년도에 주민들이 지자체의 도움을 받아 설치 되었다고 한다. 소류지에서 낚싯대를 드리운 강태공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산나물 채취하러 올라오는 동네 할머니와 무엇을 채취하는지 여쭤 보면서 고갯길을 올랐다. 낙엽..

보령의 산 2021.04.12

보령의 산(제15편 ; 운봉산)

1. 들어가며 운봉산(雲峯山, 해발 337m)은 웅천읍과 주산면에 걸쳐 펼쳐진 산으로, 외산과 성주에서 흘러오는 웅천천이 협곡을 이루며 뱀처럼 포곡을 이뤄 흐르는데 이 협곡을 막아 보령댐을 설치한 후엔 한층 더할나위 없는 조망을 갖는다. 웅천은 백제와 신라시대부터 부여로 통하는 길목으로, 성주사로 통하는 길목으로서 중요한 역활을 하던 포구였다. 지역 향토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삼국통일 후 왜의 지원을 받은 백제부흥군과 나당 연합군의 전투가 치뤄진 전적지로 임존성(任存城)과 주류성(周留城)을 주요 거점으로 삼는데, 임존성은 예산군 대흥면의 봉수산성을 말하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가 없는 반면 주류성의 위치는 지역의 향토사학자마다 다른 이론을 제기하면서 주장이 난무한 편이다. 우리지역 향토사학자 중에서 주..

보령의 산 2021.04.09

보령의 산 (제14편; 해망산)

1. 들어가며 왕대산과 생앵산 사이에는 해안을 끼고 해망산(海望山, 해발 114m)이 있다. 이 지역의 지명은 대체로 고려말 왜구 토벌과 관련하여 김성우 장군의 전적지로 인하여 생겨났다는 것이 통설이다. 상주막, 해망산, 군헌(군마루), 흑포, 관암, 영전 등의 지명이 이에 속한다. 고려말 왜구의 침략으로 서해안 일대가 초토화 되고 백성들이 마을을 버리고 피난을 가는 바람에 이 지역이 황폐화 되었다고 한다. 다행히도 도만호 김성우 장군이 이곳으로 진주를 하여 왜구를 크게 섬멸 하였으며 그 공으로 이 지역을 녹읍받아 그 후손들과 외손들이 번성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해망산은 비교적 고도는 높지 않지만 바닷가에 인접하여 확트인 조망권을 가지고 있기에 해안선 멀리까지 바라다 볼 수 있는 망루와 ..

보령의 산 2021.03.28

제121편 ; 미산 아미산 중대암

1. 들어가며 용수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용암부락(龍巖部落)과 수현부락(水絃部落)이 통합되어 불리게 되었다. 용암(龍巖)이라는 지명은 양각산 줄기에 서 있는 용바위에서 유래 되었는데, 옛날에 동굴에서 나온 용이 승천을 하였다는 전설을 품고 있다. 웅천천을 중심으로 건너편 마을의 지명이 수현(水絃)인데 아미산 줄기를 따라 위치한 부락으로 산세에 의해 물이 풍부하여 부락명을 수현(물줄)이라 하였다고 하는데 수현(水絃)이라는 이름은 염뜸마을에 남아 있는 파주염씨 사당의 이름이 수현사(水鉉祠)로 남아 있다. 용암마을이나 수현마을이 보령댐의 수몰로 인하여 뿔뿔이 흩어져 인물도 사라지고 지명도 사라질까 걱정이 된다. 아미산의 장군봉 아래로 골짜기가 깊은데 이곳에 상대, 중대, 하대암이 자리하고 있다. '..

제120편 ; 미산 박승건, 박세주 정려각

1. 들어가며 도화담 삼거리에서 외산면 쪽으로 조금가면 왼쪽으로 산 아래 정려각이 있다. 대부분의 정려각이 한 칸 정도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데 이곳은 정면 두 칸에 측면 한 칸으로 제법 잘 보존되고 있었다. 조선시대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유교 국가였기에, 특히나 충효에 대하여는 백성들에게 인간의 근본임을 강조 하였다. 이에 따라 전국에는 지역 유림들의 상소에 의해 효자 ,열녀에 대한 정려각이 나라에서 하사되어 마을 입구에 세워지는 일들이 많아졌다. 박세주는 아버지가 용인군수로 있을 때 지병으로 고생을 하게 되자, 열세살의 어린 나이로 아버지의 임지로 가 병수발을 하였다고 한다. 어머니와 마주 앉은 아버지가 죽순을 먹고 싶다고 하자 추운 겨울날 밖으로 나와 대나무밭을 돌아다니며 죽순을 찾아 보았지만 구..

보령의 산 (제13편 ; 아미산)

1. 들어가며 매년 봄철마다 동무들과 고향산을 탐방 하기로한 약조를 하고 아미산(해발 638.5m)에 다녀온 일이 2009년 5월이었으니 벌써 12년 전의 일이 되었다. 이따금 고향땅의 유적지 탐방을 하느라 보령댐 둘레길을 오갔지만 아미산을 등정한 것이 이렇게 오래전의 일인지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왔나 보다. 서울에 살면서 고향산을 찾아 오르내리던 일들과 동무들과 함께하던 추억들이 눈앞에 선하게 떠 오르는 산행길이 되었다. 코로나가 빨리 사라지고 더 늦기 전에 동무들과 함께하는 산행길이 되었으면 하고 발길을 재촉한다. 미산초등학교 앞 웅천천변으로 체육공원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곳에 차를 주차 시키고, 초등학교 뒷편 주택가의 등산로를 따라 능선길을 오른다. 주변에는 소나무는 별로 없고 활엽수종이 주로 산재 하..

보령의 산 2021.03.24

제119편 ; 주산 주렴산 기미독립만세 기념비

1. 들어가며 주렴산을 올라보니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일제강점시기에 일제의 핍박에 떨쳐 일어난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갈 즈음 서울에서 활동하던 지식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만세운동의 선두에 서서 불을 지폈었다. 우리 고향에도 산봉우리에서 만세운동을 하였던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성태산의 만세봉과 환산의 만세봉, 주렴산 국사봉 등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 당시 대부분 오일장이 서던 장날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기에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추진 하였으나, 왜경들의 감시가 심하여 산꼭대기로 올라가 횃불을 들고 소리를 쳐 주민들의 호응을 얻고, 왜경들에게 두려움을 주기 위한 방편으로 이런 식의 시위운동을 추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나라의 국권을 빼앗기고 고종의 국장일을 기해 전국적으로 만세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