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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의 산 (제3편 ; 생앵산)

1. 들어가며 성주산 줄기가 옥마봉으로 흘러 남서방향으로 봉화산과 잔미산을 거치며 화락산과 통달산의 봉우리를 내주고 웅천천 하구의 서해바다로 빠져 든다. 그 중에 한줄기는 옥동리 부근에서 고개를 급히 숙여 건너편으로 당경산과 왕대산, 그리고 해망산과 생앵산을 거쳐 대천항 부근에 곶을 내주고 바다로 빠져드는 형세를 갖는다. 대천항의 옛 지명은 군두리, 혹은 한자음으로 군입리라 불리는데 려말선초 김성우장군이 군을 이끌고 들어온 지점이라 하여 지명이 유래된 것이며, 해수욕장 부근의 거먹개, 즉 흑포라는 지명으로 신흑동이라는 지금의 마을 이름이 되었다. 해망산 또한 바다로 침입해 들어오는 왜적들을 망 보던데에서 이름을 얻었으니 이 부근 요소요소가 김성우장군의 토왜의 현장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

보령의 산 2021.02.03

제117편 ; 남포 경순왕 경모전

1. 들어가며 대천역에서 해수욕장으로 향하는 대해로를 따라 4.5km를 가면 좌측으로 남포면 제석리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인다. 마을길을 천천히 달리다보면 좌 우측으로 장승들을 세워 놓아 전형적인 농촌마을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듯 하다. 하지만 이곳도 도심의 물결이 스며드는지 주택의 형태가 농촌의 이미지를 벗고 현대적으로 변하여 가고 있는 듯 하다. 큰도로 마을 입구에서 약 1.2km 정도 들어오면 '경순왕 경모전 입구'라는 돌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그 농로길을 따라 약간 들어서면 스러져 가는 장승과 임도의 차단봉이 보인다. 시멘트 포장길의 경사로를 따라 조금 올라가다 보면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 가려진 솟을 대문이 보인다. 나즈막한 돌담으로 둘러쳐진 경모전은 하단부 주차장에서 한참 올려다볼 수 있듯이 ..

보령의 산 (제2편 ; 왕대산)

1. 들어가며 대천 시내로 불어오는 서해바다의 거센 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림 역활을 하는 것이 왕대산이다. 왕대산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망국의 한을 서해바다를 바라보면서 삼키었다는 전설을 가진 천년고찰 왕대사가 자리하기도 하였다. 이 산은 야트막하나 앞 바다에서 보령을 바라보노라면 오서산과 옥마산이 뱃사람들의 등대 역활을 하는데 낮게 드리워진 앞산의 형태를 하고 있다. 지질학적으로는 퇴적암으로 이루어진 성주산 지층과는 별개로 화강암층으로 이루어져 곳곳에 커다란 바위들이 노출되어 있다. 신라시대 조성된 성주사지에 쓰인 대부분의 석재가 이곳에서 생산이된 암석이고 대천천에 설치되어 있던 한내돌다리의 석재도 이곳의 채석장에서 생산된 것으로 확인이 되듯 질좋은 화강석의 채취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산행..

보령의 산 2021.01.29

보령의 산 (제1편 ; 양각산)

1. 들어가며 타향살이 접고 고향으로 귀향한지 벌써 네 해가 되었다. 틈 나는대로 고향산천을 두루두루 찾아 다니면서 산행길도 마다하지 않았었다. 더구나 고향을 감싸안고 굽이치는 곳곳의 명산도 내 핏줄의 근원이거니 생각하며 발길을 하였는데, 작년 정초에 성주산을 오르다가 문득 ' 앞으로 이 산들을 얼마나 더 오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하였다.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오를 수 있는 산이라 생각했었는데, 그날 하산길에 무릎이 아파오는 것을 느끼며 육체의 쇄락으로 인한 나이에 의해 어쩌면 이젠 열 손가락도 채 꼽지 못할 것 아닌가하는 두려움이 들었다. 고향을 감싸안은 명산들은 산악인들의 산행기에 의해 인터넷에 많은 소개글들이 있기에 특별히 소개할 것들이 없을 것 같아 내쳐 놓았었는데, 앞으로 더 ..

보령의 산 2020.12.31

제116편 ; 웅천 구룡리 돌방무덤

1. 들어가며 이어니재를 넘어 웅천으로 들어서며 다리를 건너기 전 우측으로 개천길을 따라 들어가다보면 웅천돌문화공원이 나온다. 그 입구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집성당을 들르고 돌문화공원의 산책길을 따라 시비(詩碑)에 쓰인 글을 음미하면서 걷고 있었다. 석재 전시실을 지나 정자 쪽으로 발길을 하는데, 우측 잔디언덕으로 돌무덤의 표지판이 있어 다가가니 백제시대로 추정되는 유물이 복원되어 있었다. 표지판의 원소재지를 보니 구룡리이다. 구룡리에 확장 조성되고 있는 웅천산업단지로 인하여 이곳으로 이전하여 복원하여 설치한 것 같다. 화락산 줄기를 등에 업고 노천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석실분과 비슷한 형태의 돌방무덤을 한 구룡리 석실분도 백제 시대에 이곳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지방 호족세력이 웅천천의 넓은 경작지를 기..

제115편 ; 웅천읍 집성당(集成堂)

1. 들어가며 웅천읍 대천리 웅천초등학교 옆으로 하천을 따라 500여 미터를 가면 화락산의 동쪽 사면에 집성당(集成堂)이 있다. 집성당은 구한말 서원철폐, 강화도조약 등으로 조선사회의 유교적 가치관이 쇠락해지자 경기도 양주군 장흥에서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그리고 우암 송시열의 학문을 계승한 삼희당 윤석봉(三希堂 尹錫鳳)이 1888년 충청도 비인으로 재종숙 윤건오(尹建五)와 함께 가족을 데리고 낙향하였다가 1890년 웅천의 화정으로 이주하여 후학을 가르치며 호서지역의 남당학파와 학자들과 교류를 하면서 세우게 된 사우(祠宇)이다. 1898년 3월에 삼희당 윤석봉의 주도 하에 보령 지역과 서천, 홍성, 청양, 부여 지역의 유림들의 지원아래 세워졌으며, 창건에 앞장 선 이들로는 율농 신섭(栗農 申섭)과 돈간..

제114편 ; 성주 남포석의 채취 흔적

1. 들어가며 성주산 정상에 오르면 남사면이 뭉둥스럽게 잘려나가 있다. 자연환경을 치유 한다고 법면을 정리하고, 석축을 쌓고, 나무를 심어 놓았지만, 인간들이 자연을 파손한 흉터가 아무는 데에는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 흘러가야 할 것 같다. 성주산에 오르면서 이곳을 지나칠 때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땅을 파헤치게 되었는지 궁금하였는데, 아마도 벼루를 생산하기 위한 돌을 채취한 채석장의 흔적이 아닌가 싶다. 성주산은 아주 오래전에 바닷 속에 있었던 지층이 어느 시기엔가 융기를 하여 높은 산을 이루게 된 지형으로 바위에 자갈이 섞여 있는 퇴적암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퇴적암층의 일부는 사암으로 흑색의 실트층으로 구성되어 있어 예부터 비석의 재료로, 또 벼루의 원석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성주산의 백운사를 중..

제 113편 ; 웅천 구 마량진 성 (舊 馬梁鎭 城)

1. 들어가며 오천의 충청수영성은 수군절도사영의 휘하에 서해안 중요한 위치마다 속진(屬鎭)을 설치하여 해안 방어에 힘을 썼다. 충청 서해안의 속진으로 조선 500여 년간 소근진(태안), 당진포영(당진), 파지포영(서산), 서천포영(서천), 평신진(대산), 안흥진(안흥), 소근진(소원), 마량진(비인)이 구축되어 지속되고 있었다. 속진은 조선 초기에는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해상 방어의 큰 역활을 하였지만 임진왜란 이후에는 대륙정세의 불안정으로 한양을 방어하는 해상 전초기지 역활로 성격이 바뀌게 된다. 그 중에 마량진은 첨사가 거취하며 장항의 서천포만호영을 지휘하면서 충청수영의 남쪽 해안을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하는데, 마량진은 조선초기에 현재의 웅천읍 황교리 광암에 설치하여 운용되다가 후에 서천군 서면 마량리..

제 112편 ; 토정선생 관련 된 전설

1. 들어가며 토정 이지함 선생은 보령출신의 큰 인물로서 이 지역의 자랑이다. 청라면 장산리 출신으로 화암서원에 조카 이산보와 함께 위패가 모셔져 숭상을 받고 있으며, 특히 개경의 서경덕 선생으로부터 수학을 하였기에 풍수나 도학에도 큰 영향을 받아 전국을 돌아다니며 자연과 인간의 연관관계에 대하여서도 끊임없는 연구를 하였다. 일설에는 토정비결이라는 책자를 엮어 서민들에게 희망의 메세지를 전파 하였다고도 한다. 토정선생이 전통적인 성리학에 기반하여 실학적인 사상을 받아들이고 민생을 구원하고자 노력한 것은 현감으로 재직하면서 상부에 올린 상소문으로도 알 수 있겠다. 하지만 세상은 그의 뜻대로 이루어 지지 않기에 세상을 주류하면서 강산의 터에 더 관심을 갖게 된지도 모르겠다. 토정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가 이 ..

제111편 ; 왕대산의 채석장 흔적

1. 들어가며 서해고속도로를 따라 대천IC를 들어서기 전 간사지를 지나 우측으로 낮게 솟아 있는 산이 왕대산이다. 왕대산은 해발 122.7m의 높이로 화강암으로 형성된 바위산으로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망국의 한을 눈물로 달래다가 간 산이라 하여 왕대산(王臺山) 이라 불리운다. 이곳의 중턱에는 천년고찰 왕대사라는 절이 있으며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되는 미륵불이 암각으로 흐릿하게 조각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이 절을 찾는다. 그 절 밑으로 오래전에 설치하였던 임도(林道)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데, 도로부분에 자란 소나무의 몸통둘레를 볼 때에 50여년 이상의 수령이 넘을 것으로 추측이 되어 임도 설치시기가 아마 60년대 전후일 것으로 보인다. 이 임도의 잡목을 헤쳐 나가다보면, 왕대사의 축대 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