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188

제26편 ; 벼락바위와 굉바위

1. 들어가며 10여년 전에 '신(新)청고을 이야기'라는 꼭지로 청고을의 고갯길, 바위, 지명, 인물에 대하여 어쭙지 않은 글을 쓴적이 있었다. 이순(耳順)에 다시 고향 길을 거닐며 그 흔적을 찾아보니 고려말 야은 길재 선생님이 읊은 시조의 싯구도 지금 세상에는 적합하지 않음을 느끼게 한다. ' 오백년 도읍지 필마로 돌아드니 /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네 / 어즈버 태평년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야은 선생은 자연은 그대로인데 사람은 간곳이 없음을 아쉬워 했는데, 지금의 시대에는 산천도, 사람도 짧은 시간에 변화가 진행 됨을 여실히 느끼게 한다. '신(新)청고을 이야기'의 5편 중에 2편에서 바위에 얽힌 이야기를 서술했었는데 선바위, 말바위, 달걀바위, 벼락바위, 집진바위, 굉바위의 현재 상태는 어떠..

제25편 ; 백제인의 얼굴

1. 들어가며 서산I.C에서 덕산면 쪽으로 한 7km 정도를 달리다 보면 가야산(677m)이 품고 있는 용현계곡이 나온다. 예전에 '서산마애불'이라고 불리웠던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의 미소가 이 계곡이 품고 있다기에 한 번 들르리라 마음을 먹었지만 쉽게 발길을 못 하였었다. 서산, 태안지역은 백제시대에, 백강의 기벌포와 함께 중국의 선진 문명과 문물이 들어오는 중요한 요충지로서 통로 역활을 하였다. 그러한 흔적들이 이곳 암벽에 남아 백제인의 숨결을 지금도 면면히 전해주는 것이 용현리매애삼존불이다. 태안 동문리마애삼존불(국보 제307호)과 함께 백제가 공주와 부여에 도읍으로 한 백제 후기시대의 명작이라 일켤어 질 만하다. 용현계곡의 산자락에 자연스럽게 비껴 위치한 바위 속에 숨겨진 석가와 미륵불을 찾아..

제23편 ; 오천의 도미부인사우

1, 들어가며 고구려를 세운 주몽은 부여에서 예씨부인과 사이에서 낳은 유리왕에게 나라를 물려 주었다.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할 때 소서노의 도움이 컷기에 주몽이 부인으로 삼았으나,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 우태와 소서노 사이의 자식인 비류와 온조는 자신들을 박대한다고 생각하고 남쪽으로 내려와 미추홀(인천)에 비류백제와 온조는 하남땅에 한성백제(몽촌,풍납)를 세우고 신라,고구려와 견제를하며 발전을 거듭한다. 백제왕조는 온조가 B.C 18년에 한성백제를 세우고 개로왕이 고구려군에게 아차산에서 죽임을 당할 때 까지 약 500여 년을 한성에 도읍을 하였고,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할 때까지 200여 년을 공주와 부여에 도읍을 하였으니 실제로 백제의 역사중 많은 부분이 한성에서 이루어졌는데도 우리는 부여와 공주의 백제 문..

제22편 ; 천주교 성지 갈매못 순교터

1. 들어가며 지난 추석명절 때 천주교신자인 딸과 사위를 위해 오천에 있는 충청수영성과 갈매못 성지를 다녀오려 했다. 가는길에 도미부인사당과 충청수영을 관람하고 오천항에 들어섰다가 연휴에 놀러 온 관광객으로 골목골목 마다 차량이 꽉 막혀 꼼짝을 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갈매못 성지에 들르지 못하고 차를 돌려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얼마 전 다시 그 곳을 찾았다. 내포지역은 일찍이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워 고려말부터 성리학(주자학)이 들어와 한국 유학의 한 부류 기호학파의 본산이 되었다. 기호학파는 율곡의 철학을 이어받는 율곡학파와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우계학파로 나뉘어 충청지역을 기반으로 발전하게 된다.(영남학파는 퇴계 이황을 뿌리로 한다.) 16세기가 성리학의 전성시대를 구가하며 임진왜란과 병..

제21편 ; 금정찰방과 영보정에 어린 정약용

1, 들어가며 화성면사무소 삼거리에서 예당저수지 방향으로 한 16km 남짓 가다보면 좌측으로 용당리마을 입구의 산자락 밑에 '금정도 찰방 다산 정약용 선생 사적비'가 몇기의 찰방공덕비와 함께 한적하게 세워져 있다. 조선시대 청양의 금정역(金井驛)은 충청내륙의 중요한 거점으로 도로명을 금정도(金正道)라 하고,청양과 대흥, 청양과 결성,홍주,보령,혜미,서산,태안을 연결되는 역로를 관리하는 역이다. 금정(金井)이란 지명은 지금의 남양면 금정리에 위치한 우물에서 나온 것으로 백제의 의자왕이 하루에 한차례씩 그 물울 길어다 먹었다하여 붙여진 것으로 전해진다. 금정도 찰방이 추후 용곡역으로 옮겨지면서 이곳 용당리 입구에 자리 했다는데, 불과 100년 전만 해도 화성장이 여기서 열렸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고..

제18편 ; 육지로 변한 보리섬(최치원선생 유적지)

1,들어가며 남포방조제가 축조되면서 육지로 변한 것은 죽도뿐만 아니라 이곳 보리섬도 내륙으로 만들었다. 유적지의 동산에 올라가 20여년전, 방조제가 없었을 당시의 풍경을 유추해보니 농경지로 변한 벌판이 넓은 갯벌로 다가오고, 서해의 바닷물이 발아래 바위에 부딪쳐 하얀 포말을 이루며, 붉은 석양의 그림자가 소나무숲을 감싸는 형상으로 다가오니 이 지역의 풍류객이 자주 찾아와 시를 읊고 가락을 즐겼을 것으로 생각된다. 남북국시대인 통일신라 말기 당나라에 유학을 다녀온 최치원 선생은 본국에 돌아와 당의 선진문명을 이땅에 펼치고져 하였으나 6두품이라는 출생적 신분에 가로막혀 그 뜻을 펼치지 못하고 전국을 돌며 유람을 하다가 신선이 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이곳에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은 성주사지의 낭혜화상비와 관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