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농삿일이 끊어진 요즈음 보령도서관에 발길을 자주 하고 있다. 많은 책들 중에 역사나 철학관련 책들에 관심이 있어 대부분 그 분야 책시렁에 발길이 멈추게 되는데 우연히 성주산에 대한 백제, 신라시대의 자료가 있어 소개 하고자 한다.
성주산의 옛이름이 숭암산(崇巖山)이었다는 것은 성주사지에 서 있는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의 금석문에 남북국시대 신라의 문성왕(재위기간; 839~857)이 낭혜화상에게 성주사라는 절 이름과 함께 숭암산이라는 산이름을 하사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聖住寺는 성스러운 인물이 주인으로 있는 절이라는 뜻이며, 그와 함께 절을 품고있는 산에도 존경을 뜻이 들어있는 숭암산으로 명명된 것이다.
그러나, 성주사라는 절은 어느시기엔가 폐사가 되어 그 터만 전해져 오고, 숭암산은 성주사에서 파생된 聖住山으로 이름이 바뀌어 전해지고 최고봉은 고려말 김성우장군과의 설화가 엮여져 장군봉으로 바뀌어 전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숭암산(崇巖山)이라고 명명되기 전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하였는데 이 자료를 보고 알게 되었다.
그 이전 백제시대에는 혜왕의 아들 법왕(재위기간; 599~600)이 이 곳에 호국영령들을 위한 오합사(烏合寺)라는 절을 세웠고, 그 시대에는 국내의 명산을 찾아 산천제를 지내는 의식이 치뤄지고 있었는데, 산천제는 국토를 수호하고 왕실의 안녕을 꾀하는 산천 호국신에 대한 제의식이었다.
백제는 3산 5악을 정하고 각각의 제를 지내는데, 그 중 나라 북쪽 경계의 오산(烏山)에도 제를 지냈다고 한다. 신라시대 사람인 최치원이 숭엄산 이전의 이름이 오서악(烏西山)이라 하였고 오서악은 '烏栖山'으로도 나오고 '五聖山'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이처럼 백제시대에는 현재의 오서산과 성주산이 두루 오산,오서산,오성산,오서악 정도로 함께 불리워 진 것으로 추측이 된다.
천백년도 넘는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라의 임금이 하사한 지명이 그대로 쓰여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에 그 땅에 얹어 사는 사람에게는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기에 충분하다.
2. 참고자료(백제사회 사상사)
백제의 산천 제사에서 가장 핵심은 三山이고 다음은 五岳이다. 삼산은 기본적으로 國都 주변에 있었다. 《삼국유사 》에 따르면 이 삼산은 日山,吳山, 浮山이었다. 일산은 현재 부여의 금성산으로, 오산은 부여 염창리의 오석산으로, 부산은 백마강 맞은편의 부산에 비전되고 있다.
한편 《삼국사기 》에는 붉은 말이 북악 五合寺에 들어갔다는 기사가 나온다. 북악은 오악의 하나이다. 이를 통해 백제에도 오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산천 가운데 오악에 해당되는 산은 《翰苑 》에 인용된 《括地志 》에서 추정해 볼 수 있다. 《괄지지 》에는 烏山, 鷄藍山, 祖粗山, 霧五山, 旦奈山, 山旦山, 禮母山 등 여러 산들이 나온다. 이 가운데 오악과 관련된 산은 國北界의 오산, 國東의 계람산, 國南界의 무오산, 北西界의 단나산이다. 국북, 국동, 국서, 국남은 바로 오악의 위치를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북악의 위치와 산이름은 오합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崇巖山聖住寺事蹟 》에 따르면 오합사는 백제 혜왕의 아들 법왕이 보령에 세웠고, 그 뒤 신라가 이곳에 성주사를 세웠다고 한다. 또 최치원이 쓴 〈四山碑銘〉에 대한 石顚老師(석전노사)의 주석에는 '옛 이름인 오합사를 성주로 하였다'고 나온다. 따라서 오합사는 백제시대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신라 말기 선종 구산문의 하나인 보령의 聖住寺를 발굴한 결과, 성주사가 창건되기 이전에 이곳에 백제의 오합사가 있었음이 확인 되었다.
성주사가 자리 잡은 산은 숭암산이다. 숭암산이라는 산 이름과 성주사라는 절 이름은 신라 文聖王이 朗慧和尙(무염대사)에게 이곳에 머물 것을 청하면서 내려준 것이다. 숭암산으로 불리기 이전 이 산의 이름은 烏西山이었다. 오서악은 '烏栖山'으로도 나오고 '五聖山'으로도 나오는데 結己郡에 자리한 산이었다. 결기군은 현재의 홍성군 결성면( 주 ; 청라동은 백제시대 신촌현에 속하였다가 남북국시대에 결성군 신읍현이 되고, 고려시대에 하남도 보령현에 속하였고 조선시대에 보령현, 그리고 1895년 보령군으로 변하였다.)이다. 백제시대에 이 산 이름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翰苑 》에 나오는 烏山이다.
오산과 오서악은 '烏'자를 공유하고 있으며 백제의 수도 부여에서 보았을 때 모두 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오서악의 백제 당시의 이름은 오산이며, 오합사라는 절 이름도 오산과 연계되어 지어진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오산(오서악)은 통일신라기에는 중사에 편제될 정도로 중요하게 여겨졌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이 산은 백제 당시에도 중요한 산으로 인식되어 북악으로 편제되었다고 하겠다.(백제사회사상사, 노종국, 지식산업사,2010.4, 535쪽~537쪽, 3산-5악의 위치 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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