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16편 ; 설잠스님의 안식처(무량사)

푸른나귀 2018. 12. 26. 11:08


1.들어가며


 청고을에서 청양이나 부여땅은 그리 멀지가 않았다.

 불과 40여년전 고등학교 다닐때 방학이 되면 우리 할머니가 넘나들던 고개를 넘어 친척집을 찾아 어른들께 인사를 여쭙고 했었다. 상중저수지 위로 다리티재를 넘어 사양면(지금의 남양면) 금정리까지 청양길을 밟았으며, 늦은목고개를 넘어 부여 외산면 지선리까지 걸어 갔었다. 한세대 전 까지 고개를 경계로 혼사로 엮어지는

친족관계가 형성되어 부지기도 많은 발자욱이 고갯길마다 이야기를 남기었는데 언젠가부터 그 고갯길이 없어지고 발길이 끊겼다.

 내 어렸을적에 우리 할머니는 무량사에 가신다며 몇일을 나갔다가 오신적이 이따금 있었다.

 갬발동네에서 먹뱅이고개(갬발-먹방간 고갯길)를 넘어 지금의 먹방이를 지나 심연동 삼거리에서 다시 골짜기를 타고 올라가면 만수산(575m)의 정상을 만나서 무량사 골짜기로 내려가는 길을 걸어서 오가곤 하신 것이다.

 초등학교 여름방학때 할머니를 따라 먹뱅이고개를 넘어 시민동(심연동)에 다녀온적이 있었는데, 고갯길을 내려오면서 보았던 초가집 몇채와 맑은 시냇물 그리고 삼거리 예배당, 오래된 소나무, 휘황찬란하던 반딧불이의 군무들이 아직도 여전히 생생하여 가슴속에 남아 있기에  언젠가는 나도 할머니가 다니시던 청고을에서 무량사까지를 한번 걸어보리라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성인이 되어 몇번인가 먹뱅이 초가집이 그대로 있을 것 같아 먹뱅이고개를 넘어가보려 발길을 찾았었지만, 숲이 우거지고 길이 없어져 돌아서기를 몇번이나 했었다. 요즘에야 등산객들이 많아져 대체로 산림도로와 등산로가 정비되어 어느정도 산길이 이어져 마음만 먹으면 찾아갈수 있겠으나 아직까지 먹뱅이길을 찾지 않는 것은 가슴속에 가지고 있는 초가집 몇채가 흔적이 없을거라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에서인가 보다.

 그래도, 무량사가 있는 만수산 둘레 등산로와 화장골의 둘레 등산로 그리고 심연동 둘레길 등산로를 수시로 찾고, 심연동에서 장군봉과 문봉산을 둘러 내려오는 등산로 또한 수시로 다녔으니 울 할머니의 발자국과 내 발자국이 겹쳐졌을거라고 믿는다.

 봄이오고 뻐꾸기 울면 아직 이루지 못한 청고을에서 무량사까지의 발걸음을 더 늦기전에 한번 해보리라 다짐한다.



2, 오세신동 김시습의 부도


 설잠(雪岑)은 유학을 공부한 시습이 세속을 피해 산으로 들어가며 얻은 子이다.  

 조선시대 세조의 왕위찬탈로 방외인(方外人)의 삶을 살아왔던 열경 김시습 선생이 말년에 찾아와 안식을 취했던 무량사는 만수산 골짜기 깊은 산중에 적막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5세때 세종에게 글을 올려 오세신동이라 일켤어졌지만 단종이 폐위되고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방외인의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인물로 신라의 최치원과 함께 우리나라 국문학사에서 큰 봉우리를 이루고 있다.

 어찌보면 최치원 선생이 이곳 골짜기 어느곳에 잠들었으니, 그도 이곳을 안식처로 삼았는지 모를 일이다.

 수도 없이 무량사를 수시로 찾아 김시습의 자화상이 안치된 영정각에 참배를 하였지만, 무심하게도 무량사 초입에서 무진암으로 들어가는 길목의 김시습 부도를 고등학생때 찾아보고 40년도 더 지난 올 가을에야 찾아 보았으니 그를 존경하는이로서 너무 무심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3. 김시습과 허균의 학문적 동질성


 우리나라 국문학의 큰 봉우리는 최치원, 김시습, 허균으로 이어진다.

 '허균의 생각'(이이화, 교육서가)을 읽으며 허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가 매월당이라는 것을 밝힌 부분을 발췌하여 기록하고자 한다.(2019.03.08)

 유학과 불교와 도교에 대해 비슷한 생각을 가졌던 사람은 매월당 김시습이다. 김시습은 불교는 신앙의 대상으로, 유학은 일반의 교양으로, 도교는 운둔과 수양으로 대했음을 볼 수 있다. 김시습이 불교와 도교에 깊숙히 빠진 것은 자유분망한 그의 성격에서 온 것이기도 하지만 시대의 형편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기도 하다. 허균이 김시습의 영향을 받았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이이화. 교육서가, 2015. 231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