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17편 ; 산책길에 만난 정려각(효자고이대정문각)

푸른나귀 2018. 12. 29. 18:10

 

 

1, 들어가며

 

   산책길에 우연히 산기슭에 세워진 정려각을 만났다.

   시간이 날 때마다 뒷산 둘레길을 산책하였는데, 이번에는 발길을 역으로 잡아 탑동입구 대해로의 소나무 보호수있는 곳에서 출발을 하여 능선을 타고 해변도로까지 가보기로 하였다.

 왕대산은 해발 123m로 낮은 봉우리에 불과하지만 능선마다 펼쳐지는 풍경과 소나무와 어우러지는 기암괴석이 높은산 못지 않다. 분명 10m가 넘는 바위는 옛사람들이 나무를 하면서,혹은 마을사람들이 기도를 하면서 바위이름을 붙여 주었을 것이고, 너럭바위같이 비스듬하고 넓게 누워있는 바위도 이름을 가지고 있었을텐데 지금은 알 수 없다.

 오르고 내려가는 산 능성이를 몇번 하다보면 경순왕이 쉬었다간 왕대사 뒷편이 된다. 국토지리원에서 설치한 삼각점이 있는 봉우리 옆 나뭇가지엔 외지의 등산객이 묶어 놓은 리본이 몇개 달려 있는데 전국산봉우리 6,000개 종주라고 쓰여있는 것을 보니 왕대산도 산으로서 등록이 되어있나 보다.

 왕대사 뒤편의 바위에 걸터 앉아 서울방향 고속도로를 조망하고, 시내를 감싸고 둘러싼 오서산,백월산,성태산,성주산,진당산,옥마산과 갯벌이 펼쳐진 대천천을 바라보며 한참이나 바닷바람을 맞이한다.

 해안도로로 내려가는 길로 발길을 옮기는데 등산객이 많지 않아서인지 옆길로 빠진것 같았는데 발아래로 자그만 비각지붕이 보여 발길이 그곳에 멈춰졌다.

 

 

2, 효자 고이대 정려각

 

   * 위치 ; 보령시 남곡동 산 2-1번지

 

 조선시대 중기는 당파싸움에 조정은 혼란해지고, 병자호란과 임진왜란등 외침에 의해 백성들은 피폐화가 극에 도달하였다. 불교를 억제하고 예를 중시하는 유교를 국가의 사상기반을 두었지만 조정에서는 예를 표면에 내세우면서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편을가르고 당쟁에만 몰두하니 백성들의 삶은 더욱 고달프기만 하였을 것이다.

 효자문이니 열녀문도 결국 조정에서 민심을 달래고 예의를 중시하고자 하는 조선의 정책에 의해 제도화 한 성향이 있다고 볼 수있다.

 보령지역에도 남포와 웅천, 그리고 미산면에서 정려각을 볼 수 있는데, 정려각을 하사 받은 이야기가 대체로 비슷하게 내려온다,

 전해저 오는 이야기는 첫째로, 엄동설한에 병이들어 누워있는 부친이 겨울에 구하기 힘든 딸기, 고사리, 죽순등이 먹고싶다하여 눈속을 헤매면서 하늘을 원망하자 하늘이 내려주었다는 내용과, 둘째로 꽁꽁 언 강가에서 잉어나 가물치가 먹고싶다는 부친의 이야기에 구한다는 내용이 있고, 셋째로 자신의 손가락을 절단하여 부친에게 수혈을 해주어 병을 낫게 한다는 내용이 꼭 들어가며, 마지막으로 부친이 돌아가신 후에 시묘살이 3년을 잘 치르어 효자라 칭송이 자자하매 고을에서 상소문을 올려 정려각이 하사 되었다는 일정의 양식을 갖추고 있다.

 이곳 효자고이대 정문각은 수혈과 시묘의 효를 행하였나보다.

 효자문과 열녀문이 가문의 영광이고 고을의 자랑이기에 집 앞이나 고을 입구에 세워 후손들에게 본보기로 남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산기슭 양지바른 곳에 위치한 이 곳의 장려각도 찾아오는 사람 없지만 뒤편에 누워있는 주인공들의 삶을 현세사람에게 무언의 의미를 전해주려고 했는지 내게 눈에 띠었나보다.

 효라는 진정한 의미가 그때와는 많이 달라졌지만, 그 기본이 내게도 아직 남아 있어 가끔은 짐이라 생각하며 살아오지는 않았는가 반성을 하며 농로길을 돌아 안식처로 돌아왔다.

 

 

3. 참고자료

 

   대천읍 남곡리(가포말) 북쪽으로 뒷산에 정문이 있는데, 이 정문이 고효자의 정려로서 지금으로부터 150여년 전에 세운 정문이다. 집안의 가르킴이 뜻이 있어 가문에서 자라나는 사람으로서 예의바름을 으뜸이라 하였고 한 가문의 번성은 존경과 신의와 예의와 사랑에 바탕을 둔다고 말했다. 한 가문에 뜻있게 자손이 퍼지고 그 씨족이 번성하는데도 서로 믿고 서로 돕고 서로 고락을 나누는데 있다 하였다.

 여기 정려가 서있는 고이대는 원래가 이세상을 태어날 때부터 가문의 슬기로운 지혜를 타고 태어나서 남의 것을 존중하고 또한 예의에 벗어난 일을 하지 않는 참으로 착한 사람으로 태어났다. 그는 본관이 제주로서 호는 만선(萬善)이었으며, 이조,순조 때 1816년 고치국(高致國)을 아버지로 하고 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이웃과 친했고, 벗들과 싸우는 일이 없으며 벗들과 앉으면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이야기만 나누니 마을사람들은 그의 순량(順良)하고 차분하고 배운 것이 많음에 모두 감탄하는 것이었다.

 그가 자라서 겨우 세상물정에 익숙해지며 이제는 한 남자로서 구실을 할 수있는 나이를 얼마 두지않고 그의 아버지가 병상에 눕게되니 그는 놀래지 않을 수 없었고 하늘이 꺼지는 것 같았다. 아버지의 병환은 날이 갈수록 심해 갔으며 급기야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기동마져 못하게 되니 그는 눈앞이 깜깜했다. 허나 어떻게 해서든지 아버지를 살려야겠다는 그는 약을 구하러 사방을 뛰어 다녔으며 이제는 그도 지쳐서 가끔 돌뿌리에 채여 넘어지기도 했다. 아버지의 병환이 점점 더해지자 그는 아버지의 변을 직접 맛보고 병세를 판단하려고 하니 이처럼 고귀한 자식이 어디에 있겠냐고 마을 사람들이 눈시울을 붉혔었다.

 그의 정성이 그래도 부족했던지 아버지는 그를 남기고 영원히 눈을 감았다. 그때 그의 아버지는 31세에 요절하니 순조33년(1833)이었고, 그의 나이는 17세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허전한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서 그는 가진 노력을 했었다. 살아계신 어머니에게 극진한 효도를 다하는 것은 물론이요 심지어 어머니 잠자리까지 보살피는 아들이었다. 어버지에게 못다한 효도를 어머니에게 베풀어 어머니는 61세까지 장수하였다. 어머니도 드디어 병석에 눕게되니 고통을 더하실때도 그는 어머니의 아품을 자기의 아품으로 생각하고 모든 정성을 다하였다. 그러나 운명은 천명이었던지 어머니 마져도 고종1년(1864)에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는 아버지때와 같이 산소를 지키는 것이었다. 아짓껏 효도를 다하지 못한 자식을 용서해 달라고 산소에서 몸부림치는 것도 한두번이 아니니 마을 사람들도 그를따라 우는 사람이 많았다.

 그의 효심은 드디어 방방곡곡에 알려지니 나라에서 알고 그에게 통훈대부 사헌감찰의 벼슬이 내려지고 효자문을 세우도록 임금님께서 정려를 내리셨다. 효자 고이대는 최씨와의 사이에 사형제를 두었었다. 사형제 중 큰아들은 득천(得天)이라 불렀었다. 큰아들도 가문에서 내려오는 효심을 닮아 부모님을 지극히 모셨다.

 아버지 고이대가 병석에 눕게되자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사방으로 약을 구하러 뛰어다녔고 아버지가 숨을 거두기 전에 몹시 신음하니 손가락을 잘라서 펄펄 솟는 피를 입에 넣어 며칠동안 연명하게 함으로서 세상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고이대도 고종8년(1871)에 55세로 숨을 거두니 아들의 지성 또한 남이 따라오지 못하게 장사를 지내니 어쩌면 한 집안에 저렇게 효지일 수 있냐고 극찬 하였었다. 그리고 나라에서 알게되자 그에게도 정문을 내리는 은전을 베풀며 동몽교관 조봉대부(童蒙敎官 朝奉大夫)로 높이 칭찬하였다.

 또한 고이대의 세째아들 승천(升天)의 아들 필문(弼文)도 학덕이 높고 효심이 지극해서 부모를 섬기는 마음 지극하니 대대로 내려오는 효도의 집안 고씨의 집을 멀리서도 감히 손으로 가르키지 못하였다 한다. 그래서 대대로 효자가 많이 나오는 집이라 세효(世孝)의 명문이라 하였으며 여기 정려도 세효정려라 부른다.(내고장 보령, 보령군, 1983, 125~12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