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들어가며
남포방조제가 축조되면서 육지로 변한 것은 죽도뿐만 아니라 이곳 보리섬도 내륙으로 만들었다.
유적지의 동산에 올라가 20여년전, 방조제가 없었을 당시의 풍경을 유추해보니 농경지로 변한 벌판이 넓은 갯벌로 다가오고, 서해의 바닷물이 발아래 바위에 부딪쳐 하얀 포말을 이루며, 붉은 석양의 그림자가 소나무숲을 감싸는 형상으로 다가오니 이 지역의 풍류객이 자주 찾아와 시를 읊고 가락을 즐겼을 것으로 생각된다.
남북국시대인 통일신라 말기 당나라에 유학을 다녀온 최치원 선생은 본국에 돌아와 당의 선진문명을 이땅에 펼치고져 하였으나 6두품이라는 출생적 신분에 가로막혀 그 뜻을 펼치지 못하고 전국을 돌며 유람을 하다가 신선이 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이곳에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은 성주사지의 낭혜화상비와 관련이 깊을성 싶다.
신라 선종의 최대사찰인 성주사의 주지스님이었던 무염대사가 88세에 열반을 하자 그의 제자들이 왕에게 비문을 요청하자 왕은 최치원선생에게 그임무를 수행하라는 명을 내리고, 최치원선생은 몇번의 사양끝에 임무를 맏았다고 한다. 그가 성주사에 머물면서 무염대사의 비문을 작성하면서 서해 절경인 이곳을 찾아 머리를 식히고 시를 읊었다고 한다.
아쉽게도 그가 병풍바위에 글을 새겼다고 하는데, 육안으로 확일 할수가 없고 다만 후대의 풍류객들이 다녀가면서 새겨놓은 화류계 이름 석자들만 확인 할수 있었다.
성주사지의 낭혜화상비와 이곳의 유적지를 연계하고, 홍성지역에 남아 있는 최치원의 흔적들을 연계하며, 부여 무량사 부근의 안식처를 확인한다면 이 지역의 문화유적 스토리텔링을 갖출수 있는 요건이 될거라고 믿는다.
2, 고운 최치원선생 유적지
*위치 ; 보령시 남포면 월전리 813-8
*지정 ; 문화재자료 제145호
남포면 월전리 보리섬(麥島)의 서쪽 바닷가에 있는 바위를 병풍바위라고 부르는데 높이 3m, 폭1.8m되는 바위 8개가 병풍처럼 서 있다고 하여 병풍바위라고 한다. 최치원이 신라말의 혼란기에 세상을 비관하고 전국을 유랑할 때 이곳 보리섬과 성주사를 왕래하며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면서 시문을 짓고 수학을 하면서 이 병풍바위에 글씨를 새겼다고 하는데, 현재는 마모가 심하여 글씨를 거의 알아볼 수가 없다.
최치원은 경주최씨의 시조로 호를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이라 하며, 신라시대를 대표하는 한학자이고, 당나라 유학시절에는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써서 이름을 날렸다. 이 보리섬은 1995년 남포방조제가 건설되기 전에는 해안에서 떨어진 아담하고 운치있는 섬이었으나, 방조제 건설로 육지로 변했다.(유적지 안내판 설명)
3. 최치원의 시
계림은 누런 나뭇잎이요(鷄林黃葉)
곡령은 푸른 소나무로다(鵠嶺靑松)
최치원이 금오산에서 조용히 글을 읽고 있을 무렵 왕건이 송악에 도읍을 정하였다는 말을 듣고 편지를 뛰웠다는 시로서 왕건이 이말을 듣고 꺼려하자 최치원은 가야산에 들어가 은거 하였다고 한다.
' 최치원이 이른바 '계림황엽 곡령청송'의 구 때문에 아찬의 직에서 물러난 것은 898년이고, 뒷날 고려의 태조가 되는 왕건은 877년 생으로 이 때 나이가 스물 한둘의 젊은이이다. 그 해 정기대감(精騎大監)이 되지만 아직은 대외적으로까지 두각을 드러날 때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시중(侍中)이 되는 것이 913년, 홍유, 배현경, 신숭겸 등에 의해 추대되어 즉위한 것이 918년으로 898년과는 20년의 상거가 있게 된다. 최치원이 말한 곡령은 송악(松岳)으로 궁예를 가리키는 것이지 왕건을 말함이 아니다.(대보문화 제7집, 최치원의 묘가 홍성에 있다는 주장에 대한 이견, 190쪽, 송하순, 1998)
'삼국사기 열전'에는 고운이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친 것(最後帶家隱伽倻山海印寺...以終老焉)' 으로 간단히 기술되어 있는데 비하여 고려시대 중기의 문인 이인로(李仁老)가 쓴 '파한집(破閑集)'은 '어느 날 아침 일어나 집을 나가서 숲 사이에 갓과 신을 남겨둔 채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 아마도 신선이 된 것이라고 여긴 절의 중들은 그날 그의 명복을 빌었다. 공(公)이 구름 같은 수염과 옥 같은 뺨 위를 흰구름이 언제나 덮고 있는 것 같았으므로 진상(眞像)을 그려 독서당(讀書堂)에 걸어 두었는데 지금도 잘 보전되어 있다.(一旦早起出戶 莫知其所歸 遺冠구於林間 蓋上賓也 寺僧以其日薦冥福 公雲髮玉협 常有白雲蔭其上 寫眞有讀書堂 至今尙存)' (상기 책,161~162쪽)
조선 후기의 학자인 서유구(徐有구,1764~1845)와 이규경(李圭景,1788~?)이 각각 '교인계원필경집서(校印桂苑筆耕集書)'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묘가 홍산(鴻山)에 있다고 언급을 하였다.(상기 책, 164쪽)
은거 이후 최치원의 말년이 어떠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그중 가장 유력한 설은, 조선시대의 서유구가 제기한 설이 아니가 한다.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서유구는 호남지방에서 전해 온 최치원의 사적들을 접하고 감명을 받아 이를 자세히 조사하였는데, 그에 따르면 최치원은 충청도 홍산(鴻山)의 극락사(極樂寺) 뒤편에 묻혔다고 한다. 비록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서유구가 풍산 홍씨 홍석주(洪奭周,1774~1842)의 집안에 소중하게 전해 온 '계원필경집'을 빌려 이를 활자본으로 간행함으로써, 최치원의 책을 세상에 선 보인 인물이었음을 생각할 때, 현재로서는 이 설이 가장 믿을 만한 것이 아닌가 한다.(새벽에 홀로 깨어, 최치원 선집, 김수영편역,213~214쪽,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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