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20편 ; 보령의 전설적 인물 김성우장군묘

푸른나귀 2019. 1. 24. 15:57


1.들어가며


  음력으로는 섣달 그믐이 다가오는 세밑이라 그런지 햇빛은 있어도 바람이 차다.

 어려서부터 그에 얽힌 이야기를 어른들의 입에서 어린 내 귀로 많이 들어왔지만, 그 앞을 수없이 지나치면서도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제서야 찾아 뵈었다.  익랑마을회관 앞에 차를 세우고, 도로옆 한켠 온실앞에 '고려국도만호절도사 김성우장군추모지비'를 들러보았다. 1994년 10월에 추모사업단을 구성하여 세웠다는 표지석이 남아 있어 읽어보고 동리 안으로 발길을 돌린다.

 산모퉁이를 돌면서 골짜기 안으로 스레이트지붕의 빈집이 보이매 이 집이 그 동무가 살던집이 아닐까 하는 잠시의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상중저수지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약간 휘 돌아가는 개울목에 정자 하나가 쓸쓸하게 남아 있고, 다리 밑으로 누가 놓았는지 어항 하나가 잠겨있다. 50여년 전 동네 아이들이 물장구치며 한여름을 지내는 아우성이 지금도 내 귀에 들리는 듯 하여 잠시 난간에 기대어 유리처럼 맑은 냇물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본다.

 농로길로 접어들고  조릿대숲을 지나치니 넓은 주차장이 나타난다.

 장군의 묘소는 사람의 힘으로 능선이를 만들었는지 성주산 장군봉을 바라보며 따스한 햇볕이 잔디밭으로 내려 앉는 것 같이 포근하게 느껴진다. 묘소로 올라가면서 장군의 묘를 쓰려고 이 능선을 지게로 퍼 날랐다면 대단한 공을 들였을거라는 헛된 생각을 해보기도 하였다.

 묘비는 세월의 풍파 속에 이끼가 끼고 풍화가 되어 뒷면의 글자는 알아볼수 없을 것 같았다. 다행이도 보령문화원에서 금석문을 탁본으로 떠서 한글 번역을 해 놓아 그 내용을 알 수가 있다.


 고려말기 원과 결탁한 권문세족이 특권을 휘두르며 국가의 재정을 어렵게하고 백성들을 궁핍하게 하였다.

 원의 황실이 내분에 휩싸여 한족들이 봉기를 일으키자 공민왕은 승려 신돈을 세워 권문세족을 견제하게 하고 원의 압박에서 벗어나려 애를 썻으나 신돈은 숙청이되고 조정은 친원파와 중국대륙에 새로 세워진 친명파로 갈리어 내분만 커지게 된다. 그 사이 남쪽으로 왜구들의 침략해 노략질이 심해지며 강화도와 예성강까지 처 들어 와 서해안 조운이 끊기게 되고 고려조정은 큰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화약을 제조한 최무선과 최영장군, 그리고 신진세력 이성계의 왜구 토벌이 혁혁한 공으로 왜구는 물러나지만

결국 원을 등에 업고 세력을 얻은 권문세족들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명과의 화친을 주장하며 농업발전과 사회변화에 중요한 역활을 한 신진사대부의 세력에 의해 힘을 잃게 된다. 

 고려말 조선초기 세력다툼 속에 줄을 어디에 대는가에 따라 역사속에 승자와 패자가 갈리게 되어 잊혀지게 되었지만, 잊혀진 역사 속에서도 입에서 입으로 면면히 이어지는 그 무엇이 있기에 지금도 패자 또한 백성으로부터 추앙을 받을 수 있는 것 같다.

  김성우 장군이 청고을에 자리를 잡고, 왜구토벌에 혁혁한 공을 세운 덕에 그 후손들 중 친손과 외손중에  이름을 날린 인물이 나오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2. 김성우장군 묘비


   *지정 ; 보령시 향토유적 제6호

   *위치 ; 보령시 청라면 나원리 산1-1 


김성우장군 묘비문 (한글 번역본)

 

공의 선대는 광주인으로 고려시중 휘 주정의 후예이다. 약간 세대를 지나 문임랑 감찰어사 휘는 유요, 어사가 윤장 봉익대부 판도판서를 낳았고 판서공께서 공을 낳았으니 고려말에 전라우도 도만호를 역임하였으니 즉 지금의 수사이다. 일찍이 왕명을 받들어 왜구를 토벌하고 보령을 지나다가 낙기토하여 인거하니 드디어 이 곳 현의 현인(賢人)이 되었다. 공께서 남호를 낳으니 증 이조판서요, 판서공이 5남을 낳으니 중로 선로 숙로 홍로 계로인바 중로는 두 차례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헌부 감찰을 역임하였고 증좌찬성이요, 찬성공께서 2남을 두었으니 맹권 공권으로 맹권은 일찍이 진사에 발탁하였으나 세상을 은둔 종신하였으며 증영의정에 배하였다. 의정공께서 32녀를 두었으니 장왈 극신으로 생진 양시에 우뚝하여 좌통례에 추증하였고 다음은 극성으로 생원에 제일이요, 문과에 장원으로 위가 우의정에 이르러 정국공신으로서 훈맹은 광성부원군을 봉하였고 다음은 극양으로 순창군수요,큰 딸은 수원판관 이치에 시집 갔고 다음은 충순위 원이에게 시집갔다. 통례공이 2남을 두었으니 문서는 무과에 올라 낙안현령으로 병조참의에 증직하였고 인서는 청주판관이다. 광성께서 1남을 두었으나 인사로 양근 군수요 팔십을 수하여 통정대부에 승차하였다. 이치가 3남을 낳았으니 장은 지번으로 내자정을 지냈고 증영의정 한천부원군이요, 차는 지무로 증영의정 한창부원군이요, 다음은 지함으로 아산현감이요, 원이가 4남을 낳았으니 충량은 만포첨사요, 효량은 3고을 현령을 지냈고 우량은 부장을 지냈고 계량은 첨지를 지냈으며 참의가 22녀를 두었으니 장은 백간으로 안산군수에 증이조참판이요 차는 중간이며 큰 딸은 이보에게 다음은 이간에게 시집갔으니 그 아들이 홍로이다. 참판이 3남을 낳았으니 태정은 문과에 올라 벼슬이 참판으로 후계가 없으며 차자 태국이 종사를 이어 받든다. 양근공이 53녀를 낳았으니 내윤 경록 경지 경상 경조요, 한천이 1남을 낳았으니 산해로 일찍이 영의정을 지냈고 한창이 아들 산보를 낳았으니 이조판서로 마침내 좌찬성에 추증이라.

오호! 공께서 몰한지 이제 200여 년인데 친손 외손자까지 벼슬이 끊이지 아니하여 저렇게 조존성 이경전 이경탁 홍명원 권신 박율 이후 이구 모두가 명망이 높은 관직에 올라있다. 지파를 기록치 아니함은 너무 번거로워서 이다. 그 옛날 우리 조부 광성군께서 이 상석을 판출하고 묘갈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졸하여 이제 어린 손자가 조부의 뜻을 받들어 진술하고자 정성을 꾀할 즈음 이홍로가 마침 절도사로서 출역(出力)하여 도우니 대략하여 원류 계통을 서술하여내가 친히 돌에 새긴다.

만력35년 정미년 봄에 삼가 정성으로서 묘전에 세운다.(자료; 광성김씨 족보)

    (참조 ; 보령의 금석문, 대천문화원, 명문당인쇄사, 2010, 648)


* 만력은 명나라 만력제의 연호이다. 만력35년은 서력 1607년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