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지난 추석명절 때 천주교신자인 딸과 사위를 위해 오천에 있는 충청수영성과 갈매못 성지를 다녀오려 했다. 가는길에 도미부인사당과 충청수영을 관람하고 오천항에 들어섰다가 연휴에 놀러 온 관광객으로 골목골목 마다 차량이 꽉 막혀 꼼짝을 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갈매못 성지에 들르지 못하고 차를 돌려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얼마 전 다시 그 곳을 찾았다.
내포지역은 일찍이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워 고려말부터 성리학(주자학)이 들어와 한국 유학의 한 부류 기호학파의 본산이 되었다. 기호학파는 율곡의 철학을 이어받는 율곡학파와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우계학파로 나뉘어 충청지역을 기반으로 발전하게 된다.(영남학파는 퇴계 이황을 뿌리로 한다.)
16세기가 성리학의 전성시대를 구가하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외침과 광해군의 폭정, 당쟁의 심화, 가난과 기근으로 인한 백성들의 원성으로 기강이 무너지고 인륜이 붕괴되는 상황에서 이들은 나라를 바로 세우는데에는 성리학을 더욱 발전시켜야만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성리학에 의한 명과의 의리를 지키고 만주족에 의해 세워진 청을 처야 한다는 주전론(主戰論)과 한족이 세운 명은 기울어지고 비록 오랑캐가 세웠더라도 청의 위세가 더욱 커지니 청과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화론(主和論)이 대립하게 된다. 주전론은 송시열,송준길,김상헌 등이 앞장섰고, 주화론은 최명길 등이 내세웠다. 주화론을 편 것이 북학파 실학으로 이용후생파라고도 하는데 '나라에 이롭고 백성에게 편리하다면 그 법과 제도가 비록 오랑캐에게서 나왔더라도 배워야 한다'며 무역과 통상, 과학과 상공업의 발전, 서양문물의 도입 등을 추구하며 변화를 꾀해왔다.
청나라에 사신단으로 쫒아갔던 역관및 상인들, 그리고 일부 양반계층들에 의해 청의 놀라운 문명을 보면서 당파싸움에 빠져있는 조선의 폐단을 절감하는 층이 생기게 되고 그들에 의해 서학(西學)도 급속도로 유입이 되었다. 서학중에는 모든사람이 평등하다고 가르치는 천주교의 유입은 천민한 백성들 계층에 하나의 등불이 되어 전국적으로 번져 가게 된다. 조정에서는 조상을 모시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배제하는 천주교를 박해하기 시작하였고, 한양의 노들강변 새남터나 양화교 옆 절두산 등지에서 천추교인을 처형하고, 천주교인이 많은 지역에까지 끌고와 그 지역에서 본보기로 처형을 하기도 하였다.
이 곳 순교지 또한 내포지역의 백성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한 한양에서 당진을 거쳐 이곳까지 외국인신부와 신자들을 끌고와 처형을 한 장소이다.
2.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
정조가 죽고 순종과 철종의 시대에는 안동김씨의 세도가 극에 달하여 백성들의 수탈이 극심해지고, 이를 견디지 못한 백성들은 원성이 끊이질 않고 민란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숨을 죽이고 안동김씨에게 상가집 개라고 비아냥 받던 흥선대원군은 고종이 왕위를 승계받자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한다. 풍속개량, 인재의 고른 기용, 양반의 세금부과, 서원철폐 등으로 백성들에게 열렬한 지원을 받는다.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할 때에는 개화의 물결이 도도하게 조선땅에 물밀듯이 밀려오는 시기였다. 청은 영국과 1840년 아편전쟁으로 난징조약에서 홍콩을 조차하기로 하였고, 1856년 영국과 프랑스 연합국에게 베이징까지 함락 당하기도 하였다. 베이징 조약으로 청은 러시아에 연해주를 양도하게 되고, 이에 따라 러시아의 조선침략이 가까워졌다고 본 대원군은 천주교도인 홍봉주와 김계호가 청나라를 굴복시킨 프랑스와 영국, 조선 3국이 동맹을 맺어 러시아를 방어해야 한다는 상소를 받고 조선에 들어 와 있는 프랑스 주교를 만나려 하였다.
그러나, 주교와의 만남은 성사되지 않고 베이징에 있는 동지사 이흥민이 '청나라에서는 서교도를 용인하고 있으나 서교도인들이 청나라 인민의 재산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등 폐해가 심각하다.'라는 편지를 받고 천주교 주교가 찾아와 러시아의 침략문제를 해결 해주지 않은 천주교인에게 실망을 하게 된다.
천주교인들에게 실망한 대원군은 천주교인을 잡아들여 처형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천주교인들이 나라가 위급한데도 무성의하고 무능력하다고 생각하고, 이로인해 병인박해가 일어나게 되고 쇄국정책을 펴게 된다.
....드디어 안주교들은 그들의 뜻대로 1866년 양력3월 30일, 즉 예수 수난 침례일에 충청도수영이 있는 보령의 바닷가에서 거룩한 피를 흘리게 되었는데 그때의 광경은 다음과 같았다. 즉 수영 바닷가의 모래사장에 자리를 잡고 앉은 충청도 수사앞에 형틀을 벌려 놓고, 만일을 염려하여 포수군으로 하여금 총을 재워 가지고 수사 앞에 서 있게 하고, 그 밖에 구경꾼들을 막기 위하여 200명의 군인으로 하여금 그 주위를 에워싸게 하였다.
사형장으로 안 주교들이 끌려나오게 되었는데,그 광경을 구경하던 사람들중에 교우가 몇 명 있어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게 되었다.
군인들이 주교에게 조선의 법대로 관장하게 절을 하라고 하니, 주교는 '서양의 법에 없는 일은 못하겠다.'라며 대답하였다. 이에 관장은 크게 노하여 군인에게 명하여 억지로 절을 시키게 한 후, 주교로 하여금 먼저 칼을 받게 하였는데, 주교는 구세주 예수와 함께 통하기 위하여 고난을 길게 받게 되었다. 우선 망나니가 첫 번째 칼로 주교의 목을 찍은 후, 그가 사람을 죽임으로써 받게 될 품값을 정하지 않은 것을 생각하고 칼질을 멈추고 관장에게 그뜻을 아뢰었다. 관장은 값을 적게 주겠다 하고, 망나니는 더 받겠다 하여 양자 사이에 인색한 자와 탐내는 마귀가 서로의 욕심을 채우려고 승강이를 거듭하면서 순교하는 주교의 사정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목이 반쯤 베인 주교의 온몸이 오랫동안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품값이 정해져 망나니가 다시 칼을 두 번 휘둘러 치게 되니 안주교는 조선에 나온지 21년 만에 마흔여덟의 나이로 천당의 진복을 얻게 되었다. 안주교의 뒤를 이어 오오매뜨로 신부는 두번 내리친 칼날에 피를 흘리고, 민유앙 신부와 황석두, 장낙소는 각각 첫 번째 칼날에 순교하게 되었다.
위의 글은 프랑스 외방전교회 소속의 리델(이복면)신부가 탈출하여 조선의 참혹한 천주교 탄압의 현장을 적은 편지의 일부이다. 이것이 바로 천주교에서 병인군란(丙寅窘難,병인교난)이라 불리는 1866년의 박해 사건으로, 조선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사건 중 하나이다. 당시 약 8천 명에서 2만 명에 이르는 교인들의 순교로 전국이 피로 물들었으며, 병인양요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한국사의 비밀 32가지, 이 수광, 북오션, 325~333쪽 발췌)
3. 열하일기
1780년 연암 박지원이 삼종형 박명원을 따라 건륭황제 만수절(70세 생일) 축하사절단으로 북경에 다녀올때, 개인수행원 자격으로 5월에 압록강을 건너서 10월에 돌아오는 장장 6개월에 걸친 청국 여행 일기이다. 연암이 40대의 나이로 중원대륙의 여행중 조선의 선비가 청국의 발전을 바라보면서 조선을 앞날을 생각하며 기록한 글이 바로 열하일기인 것이다. 이 글이 유창하고 발랄한 수필체 문장으로 패사소품제(연암체)로써 벼슬아치들 간에 물의를 이르켜 정조가 직접 규장각의 남공철(南公撤)에게 명하여 문체순정(文體醇正; 문풍을 바로잡는) 운동을 전개한 일이 발생되기도 하였다.
아랫글은 박지원이 북경의 천주교 사원에 들러 천장과 벽에 그려있는 벽화를 바라보고 느낀바를 기록한 글로 그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이 천주교를 바라보는 시각을 알 수 있겠다.
황도기략(黃圖紀略) 중 양화(洋畵)
천주당 한가운데 있는 벽과 천장에 구름과 사람들이 그려져 있다.
내 깜냥으론 헤아리기가 어렵고, 보통의 언어와 문자로는 형용할 수도 없었다. 내가 그림 속 인물을 보려 하자, 번개처럼 번쩍하면서 먼저 내 눈을 잡아채는 무언가가 있었다. 화폭 속의 인물이 내 속을 꽤뚫어보는 것 같아 영 마땅치가 않았다. 또 귀로 뭔가를 들으려 하자, 굽어보고 쳐다보고 돌아보고 곁눈질하는 그들이 먼저 내 귀에 뭐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마치 내가 숨기고 있는 것을 꿰뚫어보는 것 같아 부끄러워졌다. 내 입에서 뭔가를 말하려고 하자, 그들이 먼저 침묵을 깨고 돌연 우레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듯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붓질이 성글고 거칠다. 다만, 귀.눈.코.입 등의 사이와 터럭,수염,살결, 힘줄 등의 사이를 희미하게 갈라놓았을 뿐이다. 붓끝이 갈라진 곳을 살펴보니 꼭 숨을 쉬고 꿈틀거리는 듯 음양의 향배가 서로 어울려 밝고 어두운 데를 잘 드러내고 있었다. 한 여인의 무릎에 5~6세 된 어린애를 앉혀 두었는데, 어린애가 병든 얼굴로 여인을 바라보니, 여인은 차마 바로 보지 못해 고개를 돌리고 있다. 그런가 하면, 옆에는 시중군 대여섯 명이 병든 아이를 굽어보고 있는데, 그 중에는 참혹해서 머리를 돌리고 있는 자도 있었다. 새 날개가 붙은 귀신 수레는 박쥐가 땅에 떨어진 듯했다. 그 옆에는 왠 신장(神將)이 발로 새의 배를 밟은 채, 손에는 무쇠 방망이를 쳐들고 새 머리를 짓찧고 있었다. 또 사람의 머리, 사람의 몸뚱이에 새 날개가 돋아난 자도 있었다. 하도 기괴망측하여 도무지 뭐가 뭔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좌우 벽 위의 그림은 구름이 뭉게뭉게 쌓여 한여름의 대낮 풍경 같기도 하고,비가 오다 갖 개인 바다 풍경인 듯도 하며, 날이 샌 산골 마을의 모습 같기도 하였다. 꽃봉우리와 같은 구름에 햇살이 비쳐 무지개 빛으로 퍼져 나간다. 먼 데는 까마득하고도 깊숙하여 뭇 귀신과 온갖 도깨비가 나타나 멱살을 붙들고 소매를 뿌리치며, 어깨를 비비고 발등을 밟고 서 있다. 가까운 놈이 멀리 뵈기도 하고, 얕은데가 깊어 보이기도 하며, 숨은 놈이 드러나기도 하고, 가렸던 놈이 나타나기도 하는 등, 한마디로 모두가 허공에 등을 기대고 바람을 모으는 형세였다. 천장을 우러러 보니 수많은 어린애들이 오색구름 속에 뛰노는데, 허공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이 손으로 만지면 살결이 따뜻할 것만 같고, 팔목이며 종아리는 포동포동 살이 쪘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놀라서 눈이 휘둥그래져 떨어지면 받을 듯이 손을 바치고 고개를 졎혔다. (열하일기,박지원 지음 고미숙외3인 엮음, 북드라망.2013. 하권 120~121쪽)
@ 순교 복자비의 석재는 한내 돌다리와 동일한 재질로 추정하고 있다.
@ 순교복자비 앞에 근래에 새로 이곳에서 순교한 성인들의 비가 세워져 있다.(2021.11.06일 촬영)
'보령의 흔적따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24편 ; 대천천 자전거길(참게길) (0) | 2019.02.12 |
---|---|
제23편 ; 오천의 도미부인사우 (0) | 2019.02.12 |
제21편 ; 금정찰방과 영보정에 어린 정약용 (0) | 2019.01.27 |
제20편 ; 보령의 전설적 인물 김성우장군묘 (0) | 2019.01.24 |
제19편 ; 성주산의 옛이름 변천사 (0) | 2019.0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