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고구려를 세운 주몽은 부여에서 예씨부인과 사이에서 낳은 유리왕에게 나라를 물려 주었다.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할 때 소서노의 도움이 컷기에 주몽이 부인으로 삼았으나,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 우태와 소서노 사이의 자식인 비류와 온조는 자신들을 박대한다고 생각하고 남쪽으로 내려와 미추홀(인천)에 비류백제와 온조는 하남땅에 한성백제(몽촌,풍납)를 세우고 신라,고구려와 견제를하며 발전을 거듭한다.
백제왕조는 온조가 B.C 18년에 한성백제를 세우고 개로왕이 고구려군에게 아차산에서 죽임을 당할 때 까지 약 500여 년을 한성에 도읍을 하였고,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할 때까지 200여 년을 공주와 부여에 도읍을 하였으니 실제로 백제의 역사중 많은 부분이 한성에서 이루어졌는데도 우리는 부여와 공주의 백제 문명만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오천의 도미부인의 사우를 방문하면서 두어가지의 의문점이 생겼다.
첫째는 백제의 왕계보에는 개루왕과 개로왕이 있는데 도미와 연관되는 왕이 누구인가이며, 도미부인의 설화의 원류 발생지역이 오천과 한강하류 양화 또는 양평 중 어느 곳인가가 의문으로 다가왔다.
백제왕조 계보는 제 4대 왕 개루왕이 128~166년에 왕위를 지냈으며, 제 21대 왕으로 개로왕이 455~475년에 왕위를 지냈다. 개루왕과 개로왕 사이에는 350년의 간극이 있는데도 가해자가 어느 왕인지 명확하지 않다.
최인호작 소설 '몽유도원도'에는 개로왕으로 설정이 되어 있고, 대부분의 역사서에도 개로왕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이유로는 고구려 장수왕이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백제와의 충돌이 불가피 해졌는데, 개로왕은 북쪽 변경에 성을 쌓고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승려 도림을 첩자로 보내 바둑으로 개로왕에게 가까히 접하게 하였다. 도림은 개로왕에게 궁성과 한강제방 축성 등을 유도 하였고, 그에따라 백성들은 무리한 세금과 공역으로 고통을 받게 되고 왕에 대한 원성이 크게 되었다.
도림이 고구려로 도망을 가 장수왕에게 백제를 공격하게 한다. 개로왕은 순식간에 위례성이 함락당하고 결국 아단성(아차산성)밑에서 고구려 장수에게 목이 베이는 참수를 당하게 되고 백제는 아들 문주왕에 의해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고 한강유역을 잃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바둑을 좋아했고 폭정을 했다는 이유로 도미부인의 가해자로 개로왕을 지목하게 되었다.
그러나, 개로왕 재위 기간은 한성백제가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부족국가에서 고대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어느정도 고구려의 남하정책과 신라에 대항할 힘을 갖게되고, 법령을 갖춘 국가의 면모를 가졌기에 도미부인의 가해자로 보기에 의문이 든다.
온조가 한성백제를 세우고 초기 한강유역의 부족들을 흡수하면서 세력을 점점 확장 해 나간다. 건국초기에는 고구려와 뿌리를 같이하는 형제의 나라이기에 크게 부딪히지는 않았다. 개루왕은 건국후 약 150년이 지난 시기이기에 왕위를 지냈기에 도미부인의 가해자로 의심을 갖게 된다. 백제는 한성을 도읍으로 농경문화가 발달되고, 한강을 이용한 무역으로 상업이 발달하게 된다. 백제 초기에서 어느정도 국가가 안정이되고 왕권이 강화 되면서 개루왕이 도미부인을 유혹하지 않았나 보는 관점(한국사의 비밀 32가지, 이수광, 북오션, 2017, 42쪽 참조)이 있는데, 오천에 있는 도미부인 정절사에 있는 안내판에도 개루왕으로 보고 있엇다.
백제 초기는 고구려쪽에서 내려온 온조집단은 그 지역에 살던 부족을 회유하고 흡수하면서 세력을 키워 나갔다. 개루왕 시절에도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했을 것이다. 최인호의 소설에서 보면 도미부인이 살던 유역을 한강 하류 양화 부근을 추정하고 있다. 개로왕이 꿈에서 본 아름다운 여인을, 채홍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찾았다고 한다. 그렇게 찾은 것이 도미의 부인이다.
오천면에 전해지는 전설 또한 이곳에 미인도(빙도), 도미항, 상사봉 등 도미부인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옴에 이곳을 도미부인의 고향으로 추정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전설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들의 이동으로 함께 하기 때문에 한강하류에 전해지던 이야기가 백제의 세력확장으로 이곳까지 옮겨서 전해지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해 본다.
아뭏든, 전남 장성에서는 소설속의 홍길동을 실존인물로 추정하여 축제를 만들고 그지역 특산물에 상표적용을 하고 홍보를 해 효과를 보는데, 우리 보령에서도 도미부인의 사당을 짓고 그녀의 정절을 미덕으로 삼으며 스토리텔링의 중요한 자원으로 유지는 하고 있지만, 좀 더 도미부인을 지역민들이 먼저 알고 아끼는 마음으로 연구하고 장성의 홍길동 축제를 멘토로 삼아 발전 시키는 것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2. 도미부인 정절사
*지정 ; 충효열 시설물
*위치 ;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산18-37
도미부인은 백제시대 개루왕(128~166) 때 정절의 여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 설화의 내용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곳 보령 오천에는 미인도, 도미항, 상사봉 (想思峰) 등 백제 도미부인과 관련된 전설과 지명이 전하여 1994년 사당을 건립하고 도미부인의 영정을 봉안 하였고, 2003년 경남 진해의 '도미총'을 보령으로 이장하여 도미부부 합장묘를 조성 하였다. 해마다 도미부인의 절행과 정신을 기리는 '도미부인 경모제'를 지낸다.(도미부인 정절사 안내판)
3. 참고자료
≪삼국사기≫열전에 실린 인물 중 백제사람은 단 세 명에 불과하다. 흑치상지와 도미부부, 그리고 계백이다.
이 중 흑치상지에 대한 기록은 ≪구당서≫와 ≪신당서≫에서 따온 것으로 보이는 게 학계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즉 중국쪽 기록에 중요 인물로 다루었기 때문에 ≪삼국사기≫에도 수록되었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백제 같은 한국 고대국가 계통의 기록에 근거를 둔 인물은 도미부부와 계백이 남는다. 여기서 도미 부부는 실존 인물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설화적인 이야기 속에 나온다. 개루왕(蓋婁王)이라고는 되어 있으나, 사실인자 확인하기 어려운 왕의 추잡스런 사생활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적어도 정치적인 의미있는 인물은 아니다.
이에 비해 계백은 황산벌 전투라는 상당히 중요한 역사적 사건과 연계되어 나온다. 즉 ≪삼국사기≫ 열전에 소개된 백제 사람 가운데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으면서도 한국 고대 국가 계통의 기록에 기반을 둔 인물이 계백뿐이라는 얘기가 된다.(의자왕을 고백하다. 이희진, gr. 2011, 100쪽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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