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21편 ; 금정찰방과 영보정에 어린 정약용

푸른나귀 2019. 1. 27. 10:28

 

 

 

1, 들어가며

 

  화성면사무소 삼거리에서 예당저수지 방향으로 한 16km 남짓 가다보면 좌측으로 용당리마을 입구의 산자락 밑에 '금정도 찰방 다산 정약용 선생 사적비'가 몇기의 찰방공덕비와 함께 한적하게 세워져 있다.

 조선시대 청양의 금정역(金井驛)은 충청내륙의 중요한 거점으로 도로명을 금정도(金正道)라 하고,청양과 대흥, 청양과 결성,홍주,보령,혜미,서산,태안을 연결되는 역로를 관리하는 역이다. 금정(金井)이란 지명은 지금의 남양면 금정리에 위치한 우물에서 나온 것으로 백제의 의자왕이 하루에 한차례씩 그 물울 길어다 먹었다하여 붙여진 것으로 전해진다.  금정도 찰방이 추후 용곡역으로 옮겨지면서 이곳 용당리 입구에 자리 했다는데, 불과 100년 전만 해도 화성장이 여기서 열렸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고즈녁스럽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1795년 병조참의로 재직 하다가 중국인 신부 주문모의 밀입국사건으로 그의 형 정약전이 연루되자 그 역시 천주교 신자로 모함되어 6등급이나 품계가 강등되어 금정도 찰방으로 좌천되어 이 곳으로 오게 되었다.  정조가 당파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다산을 좌천 보내면서도 '살아서 돌아올 궁리나 하라'며 다짐을 하였듯이 정조의 다산에 대한 신임은 두터웠다.  '공을 금정으로 보내는 것은 홍주지방에 서학이 급속도로 만연되고 있기 때문이오. 공이 가서 그들을 따뜻이 선도하길 바라오.'(소설 목민심서,황인경.삼진기획.2004. 중130쪽)라는 정조의 말에도 숨겨 있는 뜻을 익히 알고 있는 다산은 이 곳에 와서도 백성들의 삶을 위한 목민관으로서 성을 다하였다.  

 

  이곳 내포지방은 이존창의 영향으로 천주교인이 많았다. 자신 밑에 있는 역리(驛吏)나 역에 소속되어 있는 일꾼들이 대부분 천주교에 물들어 있었다. 그들부터 천주교의 문제점들을 열거하고 천주교에서 빠져나오도록 설득했다. 지방 유지들을 찾아다니며 천주교 금교령을 어기지 않고 제사를 지내도록 설득하고 타일렀으며 동정을 지킨다고 고집하는 여신도들을 설득해 혼인시키고 천주교도 김복성(金福成)을 붙잡아 자백을 받았다. 이 때 충정감사 유강에 의해 이존창이 체포되었고 그 과정에서 공이 인정이 되어 정조가 다시 다산을 불러 들이는데 큰 역활을 하였다.

 그렇지만, 다산의 심중에는 괴로움이 있었다. 이율배반적인 행동과 모순을 안고 있는 행위에 대한 양심상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으로 오직 신하로서 왕명에 의해 천주교인인 이존창을 붙잡게 된 것에 자신의 양심보다 관리의 입장으로 옳은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이곳에 온지 오륙개월 만에 한양으로 올라가게 된다.

 조선이 명대의 성리학(주자학)에 빠져들어 명분론적 질서를 유지함에 청으로부터 전해오는 새로운 실학의 물결을 배제하려 당리당략에 따른 당파에 휩싸이니 백성은 도탄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목민정신이 이 곳에서도 이루어 졌으니 그 뜻을 음미하면서 금정찰방과 영보정을 한번 들러보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된다.

 

 

 2. 금정도 찰방비와 영보정 연유기

 

    @ 충청수영성 지정 ; 사적 제501호

                       위치 ;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다산 정약용 선생이 이 곳에 근무하면서 오천면 소성리에 있는 충청수군절도사영(충청수영)의 수군절도사 유심원(柳心源)의 초청으로 영보정에 올랐다. 영보정은 왜적을 막기 위해 쌓은 오천성 내에 있는 정자로 바다에 근접한 산벼랑에 위치해 탁 트인 바다와 수려한 섬들에 둘러싸여 아릅답기 그지 없다. 영보정 현판에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영보정연유기(永保亭宴遊記)가 편액으로 걸려 있다.

 정약용은 '세상에서 호수,바위,정자,누각의 뛰어난 경치를 논하는 사람은 반드시 영보정을 으뜸으로 꼽는다'고 하였으며, 이지역 시인인 신종수(申宗洙)와 의기투합하여 오서산에도 오른 것으로 확인된다.

 수영성은 갑오개혁 이후 폐영되면서 성벽은 허물어지고, 수영성의 문이 사대문이었으나 현재는 망화문(望華門)이라고 불리는 아아치형 서문만이 남아 있다.

 영보정은 1504년(연산군 11년) 충청수사 이량(李良)에 의해 창건돼 7차례 중·개수를 거쳤고 1878년(고종 15년) 화재로 소실된 이후 2015년에 다시 복원됐다. 

 

  @ 금정역지(金井驛地) 지정 ; 청양군 향토유적 제14호(2018년 1월 12일)

                               위치 ; 청양군 화성면 용당리 용곡 일원

 

   금정역지는 금정역(金井驛)이 있던 역 터이다. 역은 공무 중인 관리에게 말과 숙식을 제공하는 한편 중요한 공문서 및 군사정보를 전달하는 일을 했던 곳이다. 이러한 제도는 삼국시대에 부터 있었지만 전국적인 규모로 역이 설치 된 것은 고려시대이고 조선시대에는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한양을 기점으로 역로망을 발전시켰다.

 조선시데에 충청도는 좌도와 우도로 나뉘었는데 금정도(金井道)는 우도에 속한 대표적인 역도(道)로 금정역을 포함하여 9개의 역을 관할 하였다. 금정도는 청양군 남양면 금정리에 있었는데, 1614년(광해군6)에는 충청우도 중 '시흥도'를 통합하면서 현재의 화성면 용당리 용곡으로 자리를 옮겼다. 현재 용곡마을 상당수가 당시 금정역에 포함 되었다고 전한다.

 금정역에는 종6품인 찰방(察訪)을 파견하여 관리 하였는데 1795년(정조19)에 정약용이 금정역 찰방으로 약 6개월 간 있었다. ≪금정일록(金井日錄≫은 정약용이 이때의 생활을 기록한 일기이다. 금정역은 1895년 역원 제도가 폐지되면서 사라졌고, 현재는 용당리 입구에 '금정도찰방 비석군'이 남아 있다. ( 2021년 4월 방문시 현장 안내판 발췌)

 

   

 

3. 정약용 선생의 영보정 관련 詩作

 

 1)登永保亭 (여유당 전서 2)

 

   城上朱樓積水邊 /  一簾秋色澹蕭然 /  潮携滿月趨空壑 / 島綴寒雲落遠天

   李函舊居僧獨住 /  朴誾住句妓猶傳 /  煙波萬里將何適 / 閒看沙汀고客船

 

  물이 많기도 한 물가 성 위에 붉은 난간  / 주렴밖엔 한 결로 가을빛이 맑고 쓸쓸 하구나.

  만월은 조수를 이끌어 빈 구렁을 달리고 / 먼 하늘가에 차거운 구름은 섬과 이어져 있다.

  이지함이 옛날에 살던 곳엔 중이 홀로 머무르고 / 박은의 아름다운 싯구는 기생들에게 전해지는구나.

  연파 만리에 장차 어디로 가야 하나 / 한가로이 모래사장을 보니 상인들의 배 뿐이로다.

 

  2)永保亭遇申進士  (여유당 전서 2)

 

    薄宦消搖好 / 名亭邂逅奇 / 未成王桀賦 / 先與孟嘉知

    匹馬滄洲暮 / 儒冠白髮悲 / 庶從詞伯後 / 題滿浙東詩

 

  얕은 벼슬길에 소요 하기를 좋아 하는데 / 이름난 정자에 와서 우연한 만남이 신기하다.

  王粲의 賦를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 먼저 孟嘉와 함께함을 함께 함을 알겠구나.

  필마로 물가에 와 날이 저물었는데 / 선비의 관에 백발이 슬퍼한다.

  여러 詞伯의 뒤를 좇아서 / 시를 제하여 滿浙東과 같이 하고 싶구나.

   (申進士 ; 이름은 宗洙, 1734년 출생, 1771년 사마방목에 식년시에 오름, 청라 출신)

 

 3) 永保亭 (존재집 10)

 

  畵閣휘飛綠浦灣 / 斗南兵氣大門關 / 天長水國空明外 / 地聳金城慓渺間

  鰲載千年흘雙島 / 鐘鳴半夜出寒山 / 登臨試問神仙路 / 鶴去樓空雲自還 

 

  화각은 날아 갈 듯하고 포구는 푸른데 / 남쪽에 우뚝 솟은 군병의 기상이 넘치는 큰 관문이로다.

  먼 하늘 水國의 밝은 허공 밖에 / 높고 멀리 땅에 솟은 견고한 성이로다.

  자라에 실려 천년을 떠 있는 雙島며 / 밤에 한산사에서 종소리 들려 온다.

  신선의 세계에 등림하는 길을 시험 삼아 물어 보지만 / 학이 가버린 빈 누대에는 구름만 스스로 돌아가누나.

 

 

4. 정약용 일족과 천주교와의 관계

 

  진주목사 정재원에겐 4남 1녀가 있었다. 약현, 약전, 약종, 약용과 이치훈에게 출가한 딸이다. 셋째 아들인 약종은 그 학과 덕으로 천주교계의 중진으로서 천주교회의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세례명은 '오스틴'이라고 하고, 〈주교요지〉두 권을 한국어로 출판해 대중의 교화에 위대한 공적이 있었다. 1801년 신유의 교난을 맞아 체포되어 1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장남 약현의 딸은 이미 유명한 황사영의 아내이다. 신유박해가 있을 때, 황사영은 충청도 후미진 토굴에 숨어 〈황사영 백서〉를 기초했다. 그 일이 탄로나서 1801년 11월 5일 능지처참이란 극형을 당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전 재산은 몰수당하고 죄는 삼족에 미쳐 어머니는 거제도에, 아내(약현의 딸)는 제주도에, 단 하나의 아들은 추자도에 유배되어 전 가족이 이산된 채 슬픈 말로를 밟았다.

 정재원의 외동딸이 시집간 이치훈은 이승훈의 동생이다. 이승훈은 한국에 있어서의 수세(受洗) 제1호이다. 승훈은 신유박해 당시 사교(邪敎)의 괴수라는 죄목으로 약종과 함께 서소문 형장에서 참형되었다.치훈은 황사영의 백서 사건에 연좌되어 귀양살이를 했는데, 후년 '백서 위조설'을 선포해 신유박해의 주동자였던 벽파를 공격함으로써 조야를 아연케 한 일이 있다.

 참수형을 받은 약종의 아들 하상은 비참한 일가의 운명에 굴함이 없이 잠행해 1837년 주교 앙베르를 국경에서 맞아들여 서울로 인도한 사람으로, 그해 8월 15일 자기 아버지가 처형된 서소문 형장에서 조용히 참형을 받았다.

 2남 약전의 딸은 홍봉주에게 출가를 했다. 홍봉주는 세례명을 '토마'라고 했다. 1860년 이래 전 승지 남종삼과 더불어 전도에 활약했는데, 영불(英佛)과의 동맹을 건의하다가 대원군의 비위에 거슬려 병인박해 때 참수되었다.

 이렇게 정씨 일족은 한국 천주교의 역사에 그들의 피를 주입하고 있는 것인데, 남은 삼형제도 모두 재화를 면치 못하고 구양살이를 하는 운명을 겪었다. 다산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에서 18년 동안 배소 생활을 했고, 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되어 결국 그곳에서 죽게 된 것이다.( 이병주 역사기행, 김윤식,김종회엮음. 바이북스, 2014. 83~84쪽 참조)

 

   

 

 

 

 

 

 

 

 

 

 

 

 

 

 

 

 

 

 

 * 금정찰방 부근에서 바라 본 오서산

 

    * 21년 4월 방문 시 새로 단장한 모습

    * 금정역 유적 현장 안내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