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25편 ; 백제인의 얼굴

푸른나귀 2019. 2. 17. 16:58

 

1. 들어가며

 

 서산I.C에서 덕산면 쪽으로 한 7km 정도를 달리다 보면 가야산(677m)이 품고 있는 용현계곡이 나온다.

 

 예전에 '서산마애불'이라고 불리웠던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의 미소가 이 계곡이 품고 있다기에 한 번 들르리라 마음을 먹었지만 쉽게 발길을 못 하였었다.

 서산, 태안지역은 백제시대에, 백강의 기벌포와 함께 중국의 선진 문명과 문물이 들어오는 중요한 요충지로서 통로 역활을 하였다. 그러한 흔적들이 이곳 암벽에 남아 백제인의 숨결을 지금도 면면히 전해주는 것이 용현리매애삼존불이다. 태안 동문리마애삼존불(국보 제307호)과 함께 백제가 공주와 부여에 도읍으로 한 백제 후기시대의 명작이라 일켤어 질 만하다.

 

 용현계곡의 산자락에 자연스럽게 비껴 위치한 바위 속에 숨겨진 석가와 미륵불을 찾아낸 백제의 장인의 믿음에 대한 열정이 느껴진다. 한낱 물심에서 불심을 이루어낸 백제 석공의 돌 쪼으는 정소리가 계곡에 울려 퍼지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하는 그 무엇인가가 가슴속으로 메아리 쳐 들어온다.

 

 본존상에는 보주형 광배가 빛을 발하고, 살짝 눈웃음 짓는 석가불의 얼굴에는 자비가 가득 차 있고, 미륵보살의 형태는 조금 손상이 가 있으나, 미륵 반가사유상의 특징적인 자세를 취하며 석가불을 보좌 한다.

 제화갈라보살은 석가불 뒤에 서 있는 형상으로 두 손으로 보주를 다소곳이 잡고 있으며 높은 관을 쓰고 얼굴에 만면의 웃음을 띄고 있다.

 한낱 미물에 불과한 바위에서 불심을 찾아낸 백제인들에 의해, 그들의 모습으로 천오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 까지 미소를 전해줄 수 있음은 기적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서산시청 홈페이지에 기록 된 일화를 살펴보면, 1959년 국립부여박물관 홍사준 박사가 현장조사를 하던 중 지나가던 나무꾼에게서 마애여래삼존상에 대하여 들었던 이야기를 스토리텔링의 소재로 삼고 있었다.

 “부처님이나 탑 같은 것은 못 봤지만유, 저 인바위에 가믄 환하게 웃는 산신령님이 한 분 있는디유.
양 옆에 본마누라와 작은마누라도 있지유. 근데 작은마누라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손가락으로 볼따구를 찌르고 슬슬 웃으면서 용용 죽겠지하고 놀리니께 본마누라가 장돌을 쥐어 박을라고 벼르고 있구만유. 근데 이 산신령 양반이 가운데 서 계심시러 본마누라가 돌을 던지지도 못하고 있지유“

 나무꾼에게는 중앙의 석가불이 산신령으로, 제화갈라보살은 본처로, 다리꼬고 앉아 있는 미륵보살을 후처로 생각하였다는 이야기다.(서산시청홈페이지  유적지 참조)

 

 모든 사물은 사람이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 보이 듯 바위에서 부처를 찾을 수도 있고, 미륵에서 본처와 후처를 볼 수도 있기도 하다. 일제강점시에 일본인들이 온 나라를 헤집으며 문화재를 도굴하고 도적질을 하였는데도 1959년도에서야 이 마애여래삼존불을 발견 하였다는데 의아하다. 나물이나 약초를 캐던 마을사람들이나 나무를 했던 나무꾼들, 그리고 토속신앙과 결부한 믿음의 대상으로든 이 마애불은 민중들 속에 녹아 숨 쉬고 있었을 것이다.

 

 이 마애불을 발견하고 국보로 지정이 되어 보존을 하기위해 누각을 세웠었는데, 도리어 그것이 습기를 더해 풍화가 촉진 되자 원 상태로 복원 시켰다고 한다. 누각이 설치 되었을 때는 백제의 미소를 보기 위해 등을 가지고 좌우로 비치면서 해의 방향에 따라 변하는 미소를 관찰 하였다고 한다.

 좀 아쉬운 것은 넓은 벌판을 바라다 보며 삶에 지친 중생들에게 자비를 비추는 모습을 생각 했는데, 삼존불이 깊은 계곡에서 해뜨는 산을 향해 위치하고 있기에, 찾아오는 자에게만 자비를 베푸는 것이 아닌가 하고 아쉬움이 남는다. 하기사 백제시대에 마애여래상을 축조하는 불사에 큰 힘을 보탠 시주자와 백제의 석공이 마애여래상을 부조 할 마땅한 바위를 찾느라 수 많은 고생을 하였을테니 後人으로서 과한 투정이 아닌지 모르겠다.

 

 오랜세월 숲속에 숨겨있다 세상에 나온 마애여래삼존불이 많은 사람들에게 따뜻한 미소를 전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2.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 지정 ; 국보 제 84호

              * 위치 ;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마애삼존불길 65-13

 

     마애여래삼존상을 바라볼 때, 중앙의 석가여래 입상을 기준으로 왼쪽에 제화갈라보살입상, 오른쪽에 미륵반가사유상이 조각되어 있는 백제 후기의 마애불이다.

 마애불은 자연 암벽에 선을 새겨 넣거나 도툼하게 솟아오르도록 다듬어 만든 불상을 말한다. 삼존불은 6~7세기 동북아시아에서 유행한 보편적 형식이지만 보주(寶珠)를 들고 있는 입상 보살과 반가보살이 함께 새겨진 것은 중국이나 일본, 고구려, 신라에서도 볼 수 없는 돋특한 형식이다.

 이 불상은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2.8미터의 거대한 불상으로, 단정하고 유연하게 조각된 솜씨에서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중용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서산 마애여래삼존상이 자리한 이곳 충남 서산시 운산면은 중국의 불교문화가 태안반도를 거쳐 백제의 수도 부여로 가던 길목이었다. 6세기 당시 불교 문화가 크게 융성하던 곳으로 서산 마애여래삼존상이 그 증거라 볼 수 있다. 보통 백제의 불상은 균형미가 뛰어나고 단아한 느낌이 드는 귀족 성향의 불상과 온화하면서도 위엄을 잃지 않는 서민적인 불상으로 나눌 수 있는데, 서민적인 불상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서신 마애여래삼존상이다.(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안내판 참조)

 

 

3. 참고 자료

 

 @ 태안의 마애삼존불상은 독특한 구조로 유명하다. 보통 산존불은 중앙에 부처를 모시고 양옆으로 보살을 배치한다. 그런데 태안 마애삼존불은 중앙에 보살을, 양옆에 부처를 배치한 형태다. 이러한 배치 형태는 유일한 것으로 칠지도에 새겨진 '역사 이래 이런 칼은 없었다(先世以來 有此刀)'라는 구절처럼 백제의 창조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독특한 도상형식을 갖고 있다면 그 도상배치의 목적도 특별하였다고 생각한다.

 사산 마애삼존불의 구도에는 특이한 점이 있다. 삼존불 경우 가운데 부처가 서 있든 앉아 있든 양옆의 두 보살은 보통은 서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서산 마애삼존불의 경우 한쪽 보살이 앉아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부처의 오른쪽에 있는 보살이 서 있는데 왼쪽에 있는 보살은 앉아있는 반가사유상 형태를 취하고 있다.

 * 서산 마애삼존불상은  바로 과거, 현재, 미래에 걸친 불교의 '수기사상(授記思想)'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미래의 부처가 되리란 수기는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중단된 적이 없었듯이, 부처가 과거, 현재, 미래를 거쳐 중생을 제도하리란 약속도 변함없음을 보여준다.

 그 변함없는 약속을 백제인은 천년이 지나고 만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는 돌에다 새겨 놓았다. 그러한 간절한 바람을 담기 위하여 백제인은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삼존불을 만들었다. 바로 부처의 옆에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앉아있는 반가사유상을 새겨 놓은 것이다. 

 * 삼존불 ; 제화갈라보살(과거불) → 석가불(현재불)  미륵불(미래불, 앉아서 기다리는 형상)

   (보령문화원 강좌, 2022.3.24, 조경철 교수, 백제불교의 독자성과 창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