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27편 ; 청천저수지 둘레길에 얽힌 이야기

푸른나귀 2019. 3. 9. 18:27


1. 들어가며


   일주일 넘게 미세먼지와 안개로 대기가 온통 뿌옇게 기승을 부리더니 거짓말처럼 오늘은 맑게 개었다.

 작년 겨울에 불무골 저수지 둘레길을 조성한다고 하더니 개통 되었다는 이야기를 엊그제 듣고 오후에 가느실로 향하였다.


 예전에는 가느실에서 산 능선이 임도를 따라 산책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는데 반해, 금번에 만든 둘레길은 완전하게 갈 수 없었던 저수지의 주변을 따라 힘들지 않게 돌아서 불무골과 아랫장골을 거처 다시 가느실 주차장으로 갈 수 있도록 약 5km의 산책길이 만들어진 것이다.

 가느실이라는 지명은 순수한 우리말로 가느다란 골짜기, 가느다란 실개천이 흐르는 골짜기라는 뜻이며, 이곳이 '옥녀직금형'이라는 풍수의 땅이라고 하여 마을의 형태가 옥녀가 베를 짜는 형국을 하고 있다하여 명당 택지로 알려져 있다. 마을주차장에는 베짜는 옥녀상과 팔각정이 세워져 있고, 가느실 마을의 유래비가 세워져 있다.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저수지변을 따라 서쪽으로 걷다보면 뒤쪽으로 멀리 백월산과 월티고개, 그리고 성태산의 주봉이 보이며 성주산 장군봉에서 흘러 내려온 선바위의 중계탑 능선이 펼쳐진다. 만수위를 자랑하는 청천저수지의 맑은 물결을 바라보며 조릿대 숲을 지나자 건너편 성주산 지맥이 내 발걸음과 함께하며 의평리와 향천리를 이어준다. 소나무 숲길에 깔려있는 솔고루가 밟이는 느낌이 푹신하게 발바닥으로 전해옴을 만끽하다 보니 표지판 하나가 보인다. 고령신씨 열녀비각이 이곳에 있었다는 내용과 그 흔적인 기와조각들이 돌탑처럼 세워져 있는데 소중한 문화유산이니 홰손하거나 가져가지 말라는 청라면장의 부탁이 적혀있다. 현재 열녀비각은 1989년 건너편 버드골 산자락 의평리 산41번지로 옮겨저 설치되어 있다.

 불무골과 복병이는 청천저수지의 수몰로 인하여 마을이 없어지고 말아 이젠 이름마져 아는이가 없지만 이 둘레길이 아마 그 동네의 산자락이었을 것이다. 청라면 홈페이지 마을유래편에 의하면 복병이를「서산밑」남(南)쪽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복병이」라고 부른다. 고려(高麗)때 김성우(金成雨)장군(將軍)이 이곳에다 복병(伏兵)을 매복시키고 침입하는 왜적(倭敵)을 맞아 크게 무찔렀다 한다. 우리 군사들이 숨어서 적이 찾아 들기를 기다렸던 곳에 마을이 생겼다 해서 복병(伏兵)이라고 부른다. 지금은 靑川貯水池(청천저수지)로 完全(완전) 漫水(만수)되어 없어졌다. 하고, 불무골은 복병이(伏兵) 남(南)쪽에 자리한 마을을「불뭇골」이라고 부른다. 고려(高麗)때 김성우(金成雨)장군(將軍)이 이곳에 불뭇간을 두고 병기를 만들어서 적을 무찔렀다 한다. 現在(현재)는 靑川貯水池(청천저수지)로 거의 漫水(만수)되었다. 西山밑 「담안」남(南)쪽에 자리한 마을을「서산밑」이라고 부른다. 서산(西山)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現在(현재)는 靑川貯水池(청천저수지)로 ⅔는 漫水(만수)되었다. 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둘레길 정상의 산 이름이 서산(해발 180m)임을 알 수 있고, 서산 밑의 마을이 복병이었고, 불무골은 복병이의 남쪽, 즉 평정마을의 아랫동네였나 보다.

 청천저수지의 전망대에서 향천리 마을과 왕자봉을 바라보며 댐쪽을 바라다 보니 저수지 한가운데 태양열 집열판이 설치 된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전에 보령댐의 태양열 집열판을 보고 과연 자연열 에너지를 얻기 위해 자연을 홰손시키는 것이 타당한 것인지 의아 했었는데 여기서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

  고려말 왜구들이 남포바다에서 청양과 공주로 향하기 위해 대천천을 따라 이곳을 거쳐가며 많은 노략질을 하였을 것이다. 김성우장군은 불무골에서 병기를 만들고 시루성을 쌓고, 복병이에 병들을 매복시켜 갬발동네에서 개미 많큼이나 많은 왜적들을 섬멸 하였으니 그 함성이 물결따라 들리는 듯 하다. 향천리와 의평리에 전해지는 그와 관련 된 지명속에는 600여년 전의 진실 된 이야기가 전설속에서 살아 숨쉰다.


 산모퉁이를 돌아서니 대나무숲이 발길을 멈추게 한다.

제법 오래됨직한 대나무의 스석거리는 소리는 귀를 맑게 해 주는 효험이 있는 것 같아 쓰러진 나무에 걸터 앉아 저절로 싯구 한 토막이 머리속에 떠오르게 하기엔 충분하다. 발길을 재촉하며 걷다보니 최근에 개설 된 제3코스로 접어든다. 제3코스는 복병이에서 장산리쪽으로 매몰된 서원말과 담안마을을 경우하여 아랫장골을 통해 가느실로 향하는 길이다.

 서원말은 서원(書院) 마을, 즉 화암서원이 있었던 마을이며 담안 마을은 장골의 옛 부자가 살던 담 안쪽의 마을아란 뜻이다. 위의 유래편에 의하면 서원말은「아래장골」서쪽에 자리한 마을을 서원(書院)말이라고 부른다. 1610年 숙종(肅宗)때 창건한 마을에 있어서 「書院(서원)말」이라고 불렀는데 한산이씨(韓山李氏)들이 주축이 되어 창건했던 서원이 現在(현재)는 靑川貯水池(청천저수지)로 漫水(만수)되어 洞內(동내)는 없어지고 花岩書院(화암서원)만 있다. 山中(산중)턱에 移築(이축)하였음 이라 하였고, 담안 마을은 절골」남쪽에 자리한 마을을「담안」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큰 부자(富者)가 살면서 긴 담을 쌓았었는데 그 안쪽에 마을이 자리해 있다해서「담안」이라고 부른다. 지금은 靑川貯水池(청천저수지)로 因(인)해 大部分(대부분) 漫水(만수)되었다 라고 기록 되어있다.

 윗글에서 서원말과 담안마을에 대한 기록에는 몇 가지의 오류가 발견된다. 첫째는 1610년 숙종 때 창건 되었다고 하면 숙종의 제위기간이 1674~1720년이니 맞지가 않다. 1610년은 광해군의 제위기간에 해당이 된다.

 김극성은 김성우장군의 4세손으로 이곳에 오래도록 토호 집안이었다. 우의정까지 지내고 죽어서 청천저수지 수몰 전까지 이곳에 광성부원군 사우가 있었기에 한산이씨의 화암서원과 함께 있던 곳을 서원말이라 불린 것으로 보인다.

 두번째로 담안 마을의 저택 주인이 누구였을까 생각해 보면 이지역을 기반으로 융성한 집안은 광산김씨와 한산이씨 집안인데  광산김씨 집안은 우의정을 지낸 청라 김극성(청라는 김극성의 호,1474~1540)이 필두로 크게세가를 일으켰다. 한산이씨 집안은 김극성의  누이가 한산이씨 이치(이색의 5세손,1500년대)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 토정 이지함(1517~1578)이 외가집에 가까이 살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이고, 토정의 장조카 아계 이산해(1539~1609)가 영의정 까지 지냈으니 두 집안의 혼인관계로 끈끈하게 엮이어졌다.

 이렇게 볼 때 장산리의 원 토박이 세거는 광산김씨였고, 그후 한산이씨의 세거가 형성 되지 않았나 추측해 볼 수 있으므로 서원말은 한산이씨에 의해 창건 되었으나 담안은 본 토박이인 광산김씨의 종가집였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추후 검토해 볼 필요가 있겠다.


 서원마을은 광산김씨의 광성부원군 김극성의 세거지였고 또한 토정 이지함선생을 위시한 한산이씨들의 세거지였음에 마을의 크기가 수몰 전 까지는 대단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저수지 건너편 옥계로 가는 길 모퉁이의 화엄서원이 옛날의 풍요함을 말해주는 듯하고,

아랫장골 담안의 넓은 농토와 옥계천을 따라 펼쳐지는 농토는 담을 넓게 쌓을 수 있는게 한 재력과 권력을 가진 큰 세도가가 있었음을 증명이라도 해주는 것 같다. 수몰 전에는 오서산에서 내려오는 옥계천이 수량이 풍부하고 맑으며 기암 절벽이 있어 정자를 짖고 풍류객들이 자주 찾는 계곡이었지만 지금은 물결만 출렁인다.

 

 제법 가파르게 치 올라가는 고갯길이 잠시 이어졌는데 말랭이 부분 바위밑에 직경3m정도에 깊이 5~10m정도의 구덩이가 울타리로 처져 있었다. 안내판도 없고 자연적으로 생긴 것은 아닌 것 같아 이리저리 살펴 보았다.

큼직한 구렁이가 황룡리 용소에서 이곳으로 뚫고 나와 승천을 하였는가 궁금해 하면서 발길을 돌렸지만, 주차장에 와서야 그 이유를 살펴 볼 수가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금광을 채굴한 흔적으로 짐작이 된다. 청고을에는 음현리 선유골(음현리 397번지)에도 금광의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있다. 성주산 소나무에서 송진을 채취한 흔적과 함께 나라를 잃은 민족의 아품으로 후대에게 교훈이 되어준다.


 절골 아래에서 콘크리트로 포장 된 농로를 따라 고개를 넘어 주차장에 들어서니 약 한시간 남짓한 낭만의 산책 길이었다. 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둘레길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길을 걸으며 사색을 할 수 있도록 이야기가 살아 숨쉬는 길을 만들어야 한다. 이야기가 없는 길은 고독한 길이다.

 지명에 얽힌 아야기라거나 역사에 얽힌 이야기, 때로는 새로 창작되는 이야기라도 만들어야 사람들이 찾는 길이 된다. 충분한 소재거리가 있는데도 안내판 하나 만들 예산이 없어서 못 한다는 것은 태만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지자체에서 하지 않는다면 시민단체에서라도 발 벗고 나서야 우리고장을 알리는 역활이 될 수 있다.


 충남에서 세번째로 큰 청천저수지의 둘레길에도 이야기를 심어주자...

 (붉은 글씨는 청라면 홈페이지 지명유래 참조)





2) 참고자료


 (1) 담안마을 - 토호들은 왜 큰 울타리를 두르고 살았을까?

      1456년(세조2), 이석현(李石亨)은 전라도 관찰사로 내려가 도내의 민정을 살펴보았다. 그는 집현전 학사로 오래 봉직한 탓에 지방 실정에 어두웠다. 강직한 중앙 관리로 있다가 지방관으로 나와서 실정을 알아보니 깜짝 놀랄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특히 토호들의 불법 탐학이 가장 큰 문제였다.

 부안 땅에 사는 어느 토호의 집 울타리 안에 20여 호가 올망졸망 모여 살고 있었다. 장성한 아들들이 울타리 안에 별도로 집을 지어 살고 있었으며, 사위와 동생과 조카도 별채를 지어 살고 있었다. 노비와 협호(挾戶)까지 한 울타리에서 살았다. 이렇게 한울타리 안에 따로따로 집을 짓고는 집과 집 사이에 담을 두르고 밥도 식구끼리 따로 해먹었다.

 호구 조사를 맏은 이정(里正)이 문서를 들고 그 토호를 찾아가 철저하게 조사하라는 수령의 지시를 전달하고 호구를 정확히 따지려 하였다. 토호는 이정을 달래기도 하고 어르기도 하면서 거창한 술상을 마련해 대접하였다. 이정은 호수(戶首; 호주)가 시키는대로 호구를 3~4호 정도로 적어 수령에게 보고하였다.

  며칠 뒤 수령이 직접 그 집의 호구를 확인하려고 이방(吏房)을 데리고 나타났다. 이정에게서 미리 연락을 받은 호수는 사위와 협호 장정을 피신시켰다. 장정들은 어부로 가장해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다.

 울타리 안을 둘러본 수령과 이방은 호구가 꽤 많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호수는 있는 말 없는 말 늘어놓으면서 수령과 이방을 회유하였다. 두 사람은 환대를 받은 뒤 뇌물가지 받고 관아로 돌아가 그 호수의 요구대로 호구와 장정수를 문서에 올렸다. 결국 그 토호의 울타리 안에 사는 호구와 장정 5분의 1 이상이 누락 되었다.

 사실대로 적어 놓으면 토호들이 합세하여 관가에 대항하기 때문에 수령은 불법인줄 알면서도 그들의 위세 앞에 굽힐 수 밖에 없었다.( 한국사 이야기9, 이이화, 한길사, 2015, 325~326쪽)

 조선시대는 토지 소유를 기준으로 하여 생산물의 10분의 1을 전세(田稅)로 징수하고, 군역의 대상으로 양인들은 16세에서 60세까지 부담을 하였다. 그러나 토호들의 군역 회피를 위해 이정, 구실아치, 수령과 결탁을 해 넓은 울타리를 치고 여러집을 한호로 만들어 호구조사를 방해하면서 장정의 숫자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방해하였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호적을 정리하고 호패법을 시행하려 하는데 토호들의 반발에 의해 조선시대가 지속되는 기간에 시행과 보류를 반복하게 된다.

 지방 토호세력의 담장 길이가 길어진데에는 호구조사에서 장정의 수를 누락을 시키기 위한 토호들의 방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