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예전에 예산에서 화성으로 고향길을 잡을 때에 예당저수지 길을 달리면서 오른쪽의 높은 산을 언젠가 한번 오르리라 마음만 가지고 있었던 봉수산(484m)을 오늘에서야 올랐다.
봉수산을 감싸 안으면서 둘러쳐진 임존성(任存城)은 백제의 테뫼식 석성으로 신라와 당나라의 침략으로 인한 백제 멸망 후 백제부흥군의 주요 거점으로 약 3년 간의 치열한 항거의 격전지로 남아 있어 백제의 정기를 후세에게 말하여 준다.
660년 7월 18일 의자왕은 태자 부여효와 부여태, 그리고 웅진을 방어하던 신하들과 함께 당나라의 소정방과 신라의 무열왕 앞에서 650년 간(서기18~서기660)의 백제 사직을 내 주며 무릎을 꿀었다.
신라와 당나라는 승전의 사후처리를 서둘렀으나, 백제의 남은 세력들은 쉽게 동화하거나 꺾이지 않았다. 백제의 부흥운동은 의자왕이 항복한 지 두어 달도 못되어 백제 땅 여기저기에서 줄기차게 전개 되었다. 이와 함께 고구려와 일본의 지원도 뒤늦게나마 이어졌다. 처음 백제부흥군은 충청도에서 경상도로 넘어오는 길목인 진잠과 황해 위쪽 예산 봉수산의 임존성(任存城) 등지에 몽둥이와 죽창, 낫과 쇠스랑 등을 들고 집결하여 웅진도독부의 당군들에게 공격을 가하였다. 이들은 소규모로 움직이는 당군을 공격하여 무기를 빼앗아 무장을 갖춘 후 웅진을 점령하고 사비성으로 진출도 하였다. 661년에 들어서 부흥군은 통일적인 조직을 갖추기 시작하여 무왕의 조카로 좌평에 있었던 복신과 중 도침(道침)이 남쪽의 주류성(周留城, 부안의 변산반도, 보령의 향토 사학자 중에는 백강과 주류성이 웅천에 있었다고 주장 함, 추후 설명할 것임 )에 웅거하여 백제부흥을 외치며 많은 백제 유민을 모아 힘을 키웠다. 이들은 일본에 30여년을 백제군(百濟君)으로 가 있던 부여풍(扶餘豊)을 불러들여 새로운 왕으로 추대 하였다. 부여풍(扶餘豊)은 의자왕의 아들로 어린 나이에 일본에 볼모로 갔었다.
여기에 백제의 명장 흑치상지가 합류를 하게 된다. 흑치상지는 백제의 서부출신으로 키가 장대하고 용맹스러워 나라 안에 명망이 높았다. 이들의 합류로 부흥군의 역량은 배가 되어 옹진성을 포위하고 당군의 목줄을 바짝 조이게 된다. 주류성을 중심으로 백제 부흥군은 일본과 고구려의 지원을 받아 신라와 당군을 지속적으로 유린하며 세를 키우고 있었다.
하지만, 백제부흥군은 불승세력인 도침과 왕족세력인 복신의 갈등으로 인하여 복신에 의해 도침이 제거되고 백제부흥군은 내분에 휩쌓이게 되는데, 그 와중에서도 부여풍과 복신과의 갈등이 일어나 복신도 제게되게 된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수차례 침공을 하면서도 후방의 백제 부흥군의 저항이 커지자, 당나라로 끌고 간 부여융을 백제로 보내 백제사람들의 향수를 자아내고 같은 왕자 출신의 부여풍에게 향한 충성심을 희석시키려 하였다.
부여풍은 당의 지원군이 밀어닥치자 고구려와 일본에 지원군을 요청하여 일본은 5천의 군사와 화살,양곡을 받았으나 고구려는 반응이 없었다. 663년 9월 백강 어귀에서의 전투에서 당군에게 패배를 당하고 3년 간의 백제 부흥운동은 끝이났으며 부여풍은 고구려로 달아나게 된다. 이 싸움을 끝내고 부여융은 당나라로 돌아 갔으니 의자왕의 형제 융과 풍은 적으로 만나 각기 다른 적국에 몸을 맏기게 된 것이다.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죽자 그 아들들의 내분으로 인하여 급속히 멸망의 길을 걷게 되고, 중국의 한족에게 늘상 위협이 되던 고구려가 700년 이라는 오랜세월을 융성하였지만 소멸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668년 9월 고구려 왕국은 숨을 거두게 되고, 이 역사적인 사실에 의해 거대한 대륙의 영토가 한민족의 자리에서 사라지게 되는 뼈 아픈 역사가 된다.(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3, 이이화, 한길사, 231~307쪽 참조)
대한의 아들로서 논산 훈련소에 입소하게 되면 '제2훈련소가'를 목이 터져라 부르게 된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내귀에 생생하게 익혀져 흥얼거리게도 한다. '백제의 옛터전에 계백의 정기 맑고~' . 백제의 혼이며 정기는 백제가 멸망한지 1360년이 지났어도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2. 임존성(任存城)
* 지정 ; 사적 제90호
* 위치 ; 충남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 산 8
임존성(任存城)은 충남 예산군 대흥면과 광시면, 홍성군 금마면의 분기점인 봉수산(484m)과 그 동쪽 봉우리들을 에워싼 테뫼식 산성으로 성의 바깥벽은 돌로 쌓고 안은 흙으로 채운 내탁법(內托法)으로 축조 되었다. 성안에 계단식의 단축을 만들었으며 많은 주민을 수용할 수 있도록 우물이 3곳에 있었다.둘레는 약 2.8km로 백제의 성 중 최대급 규모였다. 이곳에서 공주와 부여까지의 거리는 90리로 백제 도성의 안전과 직결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백제 의자왕 20년(660년) 나.당 연합군의공격으로 백제가 멸망한 뒤 '흑치상지가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임존성에 들어가 의거하여 굳게 지키니 열흘이 못 되어 들어오는 자가 3만명이 넘었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이곳에서 흑치상지는 복신과 함께 나당연합군을 몰아내기 위한 항전의 횃불을 올렸다.
흑치상지가 임존성에 거점을 확보하고 백제부흥군은 200여개의 백제성을 탈환하며 나당연합군에 대항하였다. 8월 26일 신라군은 임존성을 총공격하였으나이기지 못하고 소책만 깨트리고 물러났다.
663년 백강구전투(기벌포전투)로 백제부흥군이 패하여 다른 성들은 항복하였지만 지수신(遲受信) 등이 지키는 임존성은 신라군의 공격에도 30일이 넘도록 함락되지 않았다. 그것은 임존성의 험준한 지세와 견고한 성벽, 그리고 풍족한 식량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에 항복한 흑치상지, 사타상여 등에 의해 임존성은 함락이 되였고, 지수신이 고구려로 망명하면서 백제부흥운동은 끝이 났다.( 현장 안내판 발췌)
3. 후삼국 시대의 임존성
920년에 진훤은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신라로 쳐 들어가 숙원인 대야성을 마침내 함락시키고 곧 이어 김해 일대까지 석권하였다. 신라의 경명왕은 다급하여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건이 군사를 보내자 이 소식을 들은 진훤은 어쩔 수 없이 군사를 물렸다. 왕건은 장수 박수경을 신라에 보내 왕경에 상주하면서 지키도록 하였다. 두나라는 직접 부딪치지는 않았으나 이로 인하여 두 나라 사이의 평화가 깨졌다. 이때부터 두나라의 신라공략 정책이 뚜렷하게 구분되었다. 후백제는 신라를 무력으로 점령하려 했고, 고려는 회유하여 저절로 굴러들어오게 만드는 작전을 쓰고 있었다.
925년에는 왕건이 먼저 싸움을 걸었다. 진훤이 북쪽으로 진출하여 공격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선제공격을 한 것이다 왕건은 유금필을 정서대장군으로 삼아 친정에 나섰다. 유금필은 연기일대를 쳐서 빼앗고 그 여세를 몰아 임존성 공격에 나섰다. 임존성은 천연의 요새로 백제부흥군의 거점 방어성이 있던 곳이다. 이 전투는 대단히 치열하여 임존성이 함락 되었을 때 전사자를 빼고서도 3천 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 승리의 공은 유금필에게 있었다.(이이화 한국사이야기4, 이이화, 한길사, 2015, 288쪽 참조) (부여 장하리 가림산성을 임존성으로 추정하는 논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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