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28편 ; 보령경찰서 망루

푸른나귀 2019. 3. 17. 14:44

 

 

 

1. 들어가며

 

  어린시절 방학 때 마다 고향 찾아오는 길이 마냥 즐겁기만 하였다.

 장항선 완행열차를 타고 대천역에 내리면 어미 품에 안기는 듯이 마음이 설레이고, 그립던 모든 것을 가진 양 대천읍내가 신선해 보였다.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 앉히고 버스에 올라 청고을로 가다보면 차창 밖으로 돌덩이를 쌓아 만든 망루가 눈에 들어 왔었다. '도대체 저건 무엇일까?'하는 궁금증이 일어나곤 하였는데 한참 후에서야 그것이 한국전쟁의 흔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성인이 되어서 청고을에 지속적으로 다녀가곤 했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차량을 이용 하다보니 그 길을 다시 지나갈 일이 없어졌고 그 망루도 내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갔다.

 언젠가 대천읍내를 다녀오다가 대천초등학교 부근 사거리에 그 망루가 있었는데 보이질 않아 없어졌구나 하며 아쉬워 해 왔는데, 그것은  완전한 내 착각이었을 뿐이었다. 예전에는 버스노선이 경찰서 앞으로 지나다녔는데 자동차를 몰고 다니면서 경찰서 앞으로 다닐일이 없자 망루가 없어진 것으로 착각을 하였을거라 생각이 된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불과 몇일 안되어 7월 초순 보령지역이 공산군의 점령하에 놓이게 된다. 보령경찰과 천안 철도경찰대원은 장항으로 후퇴 하였다가 비인에 집결하여 공산군을 주산에서 방어하기로 하고 작전에 돌입한다. 천안 철도경찰대가 선봉부대로 주산으로 들어왔으나 이미 주산에 들어와 잠복 중이던 인민군 6사단의 기습을 받아 6명이 전사하고 1명은 총살, 9명이 포로로 잡히게 된다.

 포로로 잡힌 9명 또한 웅천 자위대원에 의해 감금과 고문을 당한 후 여늬재에서 총살 당하였다.

 남포에서 웅천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 여늬재인데 그곳에 2007년 경찰묘지를 세우고 보령지역에서 전쟁당시 순직한 경찰들을 위해 '만세보령지킴터'로 명명하고 경찰의 날, 현충일 등에 보령시와 보령경찰서에서 참배행사를 거행한다.(보령문화원 자료 참조)

 

 아이러니하게도 여늬재 경찰묘역 바로 옆에 초라한 입간판 하나가 세워져 있다.

 보령지역에서 일어난 국민보도연맹 학살사건의 현장이기도 하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위원회에서 그 사실을 확인하고 민간인 집단학살사건 현장임을 고시하고 있다.

 국민보도연맹사건이란 1950년 6월 25일부터 9월 중순경까지 군 정보국과 경찰, 헌병, 우익청년단들에 의해 소집, 연행, 구금된 후 구금자들에 대한 심사, 분류작업도 없이 곧바로 학살이 이루어진 사건으로 예비검속 및 학살은 이승만 정부의 최상층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이 된다.

 보령 국민보도연맹의 사건도 1950년 7월 초 경찰에 의한 예비검속에 최소 백여명이 보령농협 창고에 수용 되었다가 후퇴를 하던 군경에 의해 분류과정의 재판도 없이 억울하게 희생이 되었다고 한다.

 

 겨울이라서 담쟁이 덩쿨의 푸르름이 사라진 망루를 바라보며 한국전쟁 당시 시민들의 안위를 위하여 높은 망루를 쌓고 지역을 방위한 경찰들의 희생을 높이 사면서 또한, 비극적으로 치닫지 않아도 될 무고한 백성들이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해서 무차별한 학살이 정당하였다고 볼 수 없다. 좌와 우의 극렬한 사상적 대치는 보령지역 뿐만 아니라 홍성, 청양에서도 지역사회나 가정, 혹은 개인에게 크나 큰 비극의 상처로 남아 있다. 그 당시의 옳고 그름의 판단적 가치가 후대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모두가 반성을 해야 한다고 본다.

 한국전쟁이 일어난지 70년의 세월이 흘러 민주주의가 사회 전반에 정착이 되어 가고 있다고는 하나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생각과 이념의 차이가 보이면 적으로 간주하는, 극과 극을 좁히지 못하는 대화에서 현 사회의 모순을 읽을 수 있지만, 경찰서 망루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바라보며 인간세상을 비웃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2. 보령경찰서 망루

 

          * 지정 ; 지방문화재자료 제272호

          * 위치 ; 보령시 대천동 171번지 (전 보령경찰서 내)

 

  1950년 한국전쟁 중 9월 28일 서울을 다시 찾은 후 미처 북으로 가지 못한 북한군(北韓軍)과 빨치산들이 보령 시가지(市街地)와 성주산(聖住山) 일대에 은거하며 때때로 출몰하여 시민의 식량과 생필품 약탈이 빈번히 자행되자, 이에 지역을 방어하고 망(望)을 보기 위하여 1951년 세운 건물로, 자연석과 시멘트를 섞어 만든 한국전쟁사(韓國戰爭史)의 기념(記念) 시설물이다. 망루(望樓)의 높이는 12.5m이고, 안에서 밖으로 사격할 수 있는 총구(銃口) 22개와 4층의 내부 나무계단이 설치되었고, 지붕은 누각형(樓閣形) 8각(八角) 기와지붕이다. 최근까지 정오(正午)와 자정(子正)을 알리고 화재(火災)시 사이렌을 울리던 시설물로 이용되었다. (현장 안내판 내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