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30편 ; 면암 최익현 선생의 묘

푸른나귀 2019. 4. 3. 12:02





1.들어가며


  화성 삼거리에서 예산쪽으로 619번 지방도를 약 18km 정도  따라가다 보면 왼쪽으로 봉수산 기슭 아래 홍살문이 세워진 곳을 지나치게 된다. 이곳이 항일운동가인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 1833~1906)선생의 묘소이다.

 조선 고종때의 문신으로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庵)이고 포천에서 태어났으며 신라말 최치원선생의 후손으로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1900년경 본가인 청양으로 낙향을 하였다. 조선말기 대표적 위정척사론(정학을 지키고 사학을 배척하는 유교의 이념을 대변하는 사상)자 화서 이항로의 제자였으며, 학식이 뛰어나 그를 따르는 유림들이 많았다. 화서 이항로는 노론계열, 특히 그 가운데에서도 송시열을 추종하는 문도로서, 공자와 주자, 그리고 송자(송시열)를 3대 스승으로 받드는 철저한 주자학파 계열의 인물이다. 흥선대원군이 고종의 친정(親政)으로 전환 할 때에 명망 높은 유학자를 모시려 이항로를 동부승지로 제수하고 바로 대사헌으로 올려 주었으나, 이항로는 대원군의 정책, 특히 서원철폐의 잘못을 통렬히 비판하면서 사직상소문을 올리고 고향으로 곧장 돌아갔다.

 

 대원군 탄핵상소와 광화문 앞에서의 강화도조약 반대 도끼상소를 통하여 올곧은 대쪽 선비의 기질을 알렸으며, 낙향한 후에도 을사조약 체결반대 상소, 일제의 세금납부 거부투쟁 주동, 의병을 일으키는 항일운동 등을 유감없이 실천하였다.

 을사조약으로 국권을 빼앗기자 전라도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1906년 8월 말에 대마도로 유배되어 일제의 회유와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적이 주는 쌀 한 톨,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로 단식투쟁을 하여 1906년 연말에 74세의 나이로 순국을 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그를 추종하던 전국의 유림들이 나서서 부산에서 청양까지 운구로 모시려 했으나, 일본 경찰들이 민중의 동요가 우려되어 많은 방해공작을 펼쳤다고 한다. 결국에는 1907년 논산군 노성면 국도변에 임시로 묘를 썻고 1910년에야 예산군 광시면으로 이장을 하였다고 한다. 근래에 들어 후손들이 묘를 본가가 있는 청양으로 옮기려는 움직임이 있어 예산군과 갈등이 있다고도 한다.


    1) 대원군 탄핵 상소

     흥선대원군이 여러 모로 개혁정치를 추진 하다보니 세금과 재정에 폐단이 많았다. 경복궁 재건과 외침에 대비한 군비 확충에 새로운 세원(稅源)을 찾은 것이 문세(門稅)이다. 군비 충당을 위해 1867년 3월부터 한양으로 출입하는 사대문과 사소문 마다 군인을 배치하여 통행세를 받게 하였다. 그런데 문세를 받는 군인들이 공공연히 착복을 해 국고에 들어가는 분량이 3분의 1도 되지 않고 사대문을 출입하는 백성들의 원성이 커져만 갔다. 이에 최익현 등 많은 선비들이 흥선대원군을 비난하는 빌미로 삼았다. 문세는 1874년 10월, 실시 한 후 7년 만에 폐지 되었다. (한국사이야기17, 이이화, 한길사, 2015, 56~58쪽 참조)

  1868년 올린 상소문에의 조목을 살펴보면

   첫째, 공사를 중지 하라고 요구하였다. 경복궁 재건 등에 막대한 경비를 투입 하는 것은 나라를 망치는 근본이니 중지하여 백성들의 수고를 그치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둘째, 원납전 등 갖가지 징수를 중지하라고 요구하였다. 원납전으로 말미암아 위로는 공경대부와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백성들이 고통을 받는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셋째, 당백전을 혁파하라고 요구하였다. 당백전의 사용으로 농사 짓는 사람은 물건을 팔 수 없고 장사하는 사람들은 이익을 남기지 못한다고 지적 하였다.

   넷째, 사대문의 문세를 철폐하라고 요구하였다. 한두푼의 문세를 받는 것은 등짐장수나 땔나무꾼에게 구걸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여겼다.(한국사이야기17, 이이화, 한길사, 2015, 190~191쪽 참조)


2. 임병찬의 대마도 일기


   임병찬은 군수를 지낸 사람으로 면암의 거병에 제일 먼저 호응을 해 그의 막하에 들어온 사람이다. 《대마도 일기》는 1906년 6월 26일 일본군 사령부로부터 최익현은 3년, 임병찬은 2년, 고석진,최재학에게는 각 4개월의 감금선고가 내려지고, 이용길 등 9명에게 태형100대를 가하고 석방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대목부터 시작된다.

 7월 8일 부산을 출발하여 7월 9일 대마도에 도착하여 호서지방에서 정산의 이식 등 9명이 먼저 와 있었고, 최익현과 임병찬을 포함하여 11명이 일본 경비대 지키는 유배소에 감금이 된다. 이곳에서 그해 11월 17일 최익현 선생이 순국하시고, 18일 시체를 수선사로 옮겼다고 기록하였다.


  면암은 완고하기 위해 완고한 그런 것이 아니고 혼란한 세태에서 기성의 가치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완고이다. 그 이상의 가치질서를 창조하지 못할 때, 기성의 가치 질서를 지켜야 할 것이 아닌가. 우왕좌왕한 민심을 우선 그 가치 질서를 통해 수렴해야 할 것 아닌가. 면암은 그것을 자주의 기틀이라고 생각했다.

 면암이 수구의 입장을 고집한 것은 자칫 개화의 파도 속에서 본(本)을 잃을까 하는 데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자기의 주체를 잃게 된다면 개화는 곧 파멸된다는 것이 면암의 사상이었다. 그런 까닭에 면암의 수구는 낡은 것을 무작정 고수하려는 것이 아니고 본을 지키려는 수본(守本)이다.(...)

 " 내 목을 끊는 한이 있더라도 상투는 끊을 수 없다."라는 완고함을 비웃는 사람들이 있지만, 외형만 보고 진실을 보지 못한 자들이다, 상투는 가치 질서의 상징이었다. 상투를 끊되 자주적인 사고를 통해 자주적인 결단으로 끊어야 한다. 아직 뭐가 뭔지 분간 못할 어느 땅, 어느 항구로 표착할지 모르는 개화의 물결에 휘말린 채 끊을 수 없다는 것이 상투의 논리이다. 면암도 우리나라만 고립해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불평등한 수교는 안된다고 했다. 남의 나라의 노예가 될 수 없다고 했다.

  모든 정치의 근본을 자주자강에 두어야 한다고 했다. 물론 면암의 뜻은 당시로 봐선 좌절됐다. 그런데 나라를 좌절시킨 것은 개화의 물결을 타고 날뛰던 경박한 재자들이었다. 그들은 거품처럼 사라지고 면암의 자주자강 정신은 아직도 살아있다. 면암은 진정 불패의 의지인 것이다.( 이병주 역사기행, 김윤식엮음, 바이북스, 2014, 106~125쪽 발췌)  



3. 면암 최익현선생 비문내용과 재실


    1) 면암 최익현선생 춘추대의비


      배달겨례 4천년 역사에서 가장 어려웠던 한말외세로 나라의 운이 기울고 침략으로 겨례의 명마저 끊이려할 때 이 겨례에는 한 큰별이 있어 기울어가는 그 역사 위에 마지막 우뚝한 광망을 던졌으니 이제 그 빛을 가리어 우리는 면암 최익현선생의 춘추의 얼과 충의의 자취를 삼가 여기에 싣는다.

 선생의 성은 최, 휘는 익현, 자는 천겸, 호는 면암이시니 나말 거유 최치원의 후예이시다. 1833년 경기도 포천현에서 가난한 선비 휘(이름) 대(岱)의 아들로 태어나시어 1906년 적의 땅 대마도 수관( 囚館-감옥)에서 굶어서 순국하시기까지 실로 선생이 걸으신 74세의 일기는 그대로 파란 많은 우리 근대사의 별장 바로 그것이었다. 일찍이 화서 이항로선생의 문하에서 위국위도의 큰 뜻을 닦으셨고 오직 봉양의 효성으로 세우신 출임에의 길이 명경문과에서 순통으로 급제하였을 때 이미 이효사충 진충보국에의 높은 지조를 굳게 다짐하였다. 1855년 승무원부정자에서 출발 된 선생의 관직은 순경원 수봉관,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원사, 조정랑 신창현감, 사헌부 장령, 돈령부 도정, 승정원 승지 등을 거치는 동안 숱한 위공애민의 의표를 남겼으니 양민을 괴롭히는 감사의 명에 따를 수 없어 홀연히 신창현감의 관직을 버렸을 때 길을 막고 원류(남기를 원하는)하는 백성들의 가슴속에는 선정목민의 산 표본으로 남기셨으며 사헌부 장령시에는 감연히 당시의 비정을 비판하는 시정사조 상소를 올림으로써 세도정치로 막혔던 조선 조언관의 기혼을 다시 떨쳤다. 고종10년 서슬퍼런 대원군의 세도를 꺾었던 저 유명한 계유년 상소는 이 땅에서 처음 보는 입기명륜의 드높은 기상이었으며 1876년 일제가 힘으로써 불평등한 병자조약을 강요하여 왔을 때 도끼를 메고 광화문에 나아가 올린 저 척화5조 상소는 나라의 자주와 민족의 생로를 외치신 높고도 푸른 춘추정신의 발현이었다.

 그 후 선생은 공조판서, 의정부 찬정, 궁내부 특진관 등에 임명 되시고 1902년 정헌대부에 오르신 후 다시 경기도 관찰사에 제수 되셨으나 이를 모두 세번, 네번 사직 상소를 올려 사퇴하였으니 가히 선생은 이 나라 선비 중의 선비셨다. 갑오에서 을미에 이르기까지 전후 수 십차에 걸쳐 올리신 자강상소들은 기우는 이 나라를 붙잡으려는 마지막 의로운 경종이었고 1904년 국왕께 독대할 때 시국을 통곡하시여 국권의 자주와 일화차관(일본에 진 빚)의 거부와 외세의존의 불가함을 눈물로서 간하신 이른바 5조신은 그 충성어린 자자구구마다 귀신도 감읍케 한다.1905년 봄 왜적은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으려는 준비 작업으로 국가원로이신 선생을 왜 사령부로 헌병대로 거듭 감금 시켰으나 차라리 나라없는 삶은 나라있는 죽음만 못하다는 선생의 저 청청한 의기는 왜적의 총칼로도 꺽지 못하였다.

 드디어 1905년 저 을사조약으로 이 나라 천지가 바뀌고 이 겨례의 역사도 닫하려 할 때 74년 간 한번도 꺾임이 없이 지켜왔던 선생의 마지막 얼은 그 불굴의 의에 분노의 불을 당겨 겨례위해 타는 의병 민족운동의 횃불로 피어 올랐다. 조약폐기와 5적 참살의 분노를 상소로 외치시고 토적(적을 토벌함)의 대의를 밝혀 병자수호조약 이래 일제의 죄상을 낱낱이 꾸짖는 기일본정부서를 왜 공사관에 보내신 다음 온 겨례의 항일 봉기를 호소하여 8도사민의 격문을 뿌리셨다. 30여년 쌓여 온 일제의 침략상을 파헤친 저 16간조토죄문은 왜적의 간담도 서늘케 하였고 자주대한의 민이여 적에게 굽히고 살기 보다는 차라리 애국을 앞세워 싸우며 죽자는 저 포고문의 구절에서는 민족의 피가 끓어 올랐다. 그러나 당시 이름있던 사람과 재상들에게 보냈던 눈물의 호소가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자 선생은 드디어 1906년 윤4월 호남땅 태인에서 우선 임병찬 등 문인들과 더불어 의로운 기를 꽂으셨다. 수개월 간 수십차의 혈맹으로 더욱 불어난 선생의 의진은 임병찬, 고석진, 김기술, 문달환, 임현주, 류종근, 양재해, 조선식, 최제학, 나기덕, 이용길, 류해용 등 이른바 13의사를 비롯한 의군800명이었으며 태인, 정읍, 순창, 곡성 등 전라 일원을 누빈 분려항쟁 끝에 다시 순창땅에 들어왔을 때 왜적이 아닌 동족 진위대에게 포위를 당하게 되었다. 애닲다. 포위한 적이 어찌 왜적이 아닌 동족일줄 알았으랴. 이에 선생은 차마 동족상잔의 비극을 펼 수 없어 의병에게 총질을 멈추게 하셨다. 여기서 젊은의사 정시해는 총탄에 맞아 쓰러지고 순의를 기다리며 끝까지 선생을 모시던 13의사도 포박을 받고 말았다. 아! 선생의 충절에는 이같이 의가 따르고 인이 넘쳤다. 선생께서 보이신 그 충과 절과 의와 인에서는 바로 이겨례의 새로운 생명력이 이어져 나왔으니 춘추의 정신은 오늘도 병오년 선생의 의병을 의연히 우리 한민족의 승리로 기록하고 있다.

 선생은 전라의병에서만이 아니라 홍성의 민종식의병에게는 문인 의사일단을 파견 그 세를 올리려 하셨고, 강원, 충북에서 오래 계속되었던 저 유인석의 의병운동도 끊임없이 지도 격려하셨으며 또 선생의 의병 뒤에서는 문인 노응규 등 수많은 우뚝한 의병들이 줄을 이어 따랐으니 실로 선생은 한말의병의 총수요 광복운동의 원훈이셨다.

 의병에 패하신 후 선생은 적지 대마도에 감히 산몸으로도 적이 주는 한 알의 쌀과 한 모금의 물마져 물리치고 74세 일기를 들어 아사(굶어죽음)순국으로 겨례 앞에 바치셨으니 때는 1906년 음 11월 17일 새벽하늘에 일성장명도 함께 떨어지던 인시였다. 오호. 선생이 가셨을 때 조선왕조도 막을 내렸고, 5백년 이 나라 사림의 명맥도 끊겼다. 물 한 모금마저 물리친 충은 송의 문천상보다 더 하고 의적에 저항하신 의는 여말 정포은(정몽주)과도 다르며 무장 아닌 선비로서의 거의순국은 조중봉(조헌)과 이충무공 이후 이 겨례 항일투쟁사에 큰 한빛을 더한다. 한마디로 선생은 5백년 왕조의 강상을 결속하신 만고의 충이요 천재역사를 붙잡아 이 겨례의 정기를 이어주신 백세유광할 정화이시다. 선생의 겨례를 위한 이 같은 훈적 앞에 우리정부는 건국공로훈장중장 제1호를 바쳤다. 선생의 유해가 모셔진 이곳 예산 땅 대흥 봉수산 일대 일찍이 선생께서 의병선봉장으로 보내셨던 곽한일, 남규진 장군 등이 이끌던 선생이 최초의병을 투쟁하던 유서 깊은 곳. 여기 선생이 계시고 그 의병의 충혼이 역력하니 이곳을 지나는 겨례들이여 다 같이 옷깃을 여미고 선생의 그 얼 앞에서 다시 한 번 이 민족의 운명을 빌자.

    1972년 동짓달 선생의 66주 제삿날,  문화재위원장 이선근 찬, 국전서예심사위원장 김기승 서,(현장비문 발췌)

      


    2) 재실


           * 지정 ; 최익현 묘소 - 도 기념물 제29호

                       재실 - 도 문화재 자료 제415호

           * 위치 ; 충남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 산 24-1

 

        1909년 논산에 있던 면암선생의 묘소를 이장할 때 민가를 매입하여 재실로 사용하였다.

 전통가옥을 재실로 변환하여 사용하고 있는 예가 많지 않으며 건축구조와 양식적인 측면에서 조선후기의 건축사적 가치가 높은 건물이다. 건물의 배치는 조선시대 전통가옥의 배치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ㄱ'자형의 안채와 'ㅡ'자형의 사랑채가 안마당을 중신으로 하여 'ㄷ'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안내 표지판 발췌)